잃어버린 공간,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사람
2024/04/16
머스마는 차멀미로
얼굴이 핼쓱했지
한 겨울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는
속리산 지나 상주까지 가는데
자꾸 토하는 머스마를
두어 살 더 먹은
옆자리 큰 눈 상고머리 계집아이가
손을 잡고 토닥거려 주었네
제 구슬도 하나 쥐어 주었네
화령이라는 곳
계집아이는 얼굴을 만져주고
손도 한 번 흔들어주고
아비를 따라 내렸네
군청색 낡은 고리땡 긴 윗도리에
소처럼 크고 어질던 눈
머스마는 토하며 울었던가
허리가 꺾이게 허전했던가
구슬을 더 꼭 손에 쥐었던가
화령
50년도 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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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꽃에서 우려낸 염료로 옷감을 물들이고 그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처럼, 생의 풍경마다에서 우려낸 염료로 물들인 문장으로 시를 짓는다. 옷을 물들인 색으로 꽃의 연원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물들여진 문장의 색으로 풍경의 속살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연원과 색을 잇는 것은 다만 해석일 뿐이고, 그 해석의 끈도 여러 갈래다.
시는 반영이다. 자신을 응시하는 거울 형식의 반영이고, 햇살을 피하려는 이들이 찾아드는 그늘 형식의 반영이며,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도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르고 오로지 음영으로만 존재하는 그림자 형식의 반영이다. 시는 그 반영 형식 중 어느 하나만을 택하지도 않는다.
시는 축적과 상실의 비문祕文이다. 얻은 것과 얻게 될 것, 잃은 것과 잃게 될 것에 대한 비문碑文이다. 많은 시들이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시간은 무한한 크기의 자루가 아니어서 새로 얻고 잃을 것들을 담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을 덜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루는 요술자루다. 덜어냈다고,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 자루 귀퉁이에 수정처럼 결정화 되어 남아 있는 것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결정화 되는 것으로 자리를 만들어 주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
시집 <순간의 젤리>(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풍경도둑>(2020 아르코 문학나눔도서 선정), 장편소설<이야기꾼 미로>, 문화비평서<어제를 표절했다-스타일 탄생의 비밀>, 광주가톨릭평화방송 <천세진 시인의 인문학 산책>, 일간지 칼럼 필진(2006∼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