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02편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시위의 영향 두 번째 이야기와 민주화 시위를 도우려 했던 대한민국 학생들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5/28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시위 당시 북한 유학생만 시위대를 도우려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 8명이 헝가리의 자유화를 돕기 위해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이란 단체를 조직해 헝가리로 들어가는 것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의용군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 매우 낯선 단어로 여겨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 의용병들과 같이 타국의 지식인들이나 운동가들이 특정한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의용병으로 참전하는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 학도의용병이라고는 했지만 대학생은 지식인의 일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의용병이라는 단어는 나름 고품격스러운 멋이 있었다.
사진 :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민주화 시위, 사진출처 : JACOBIN, By MAX BALHORN

그러나 당시만 해도 헝가리가 한국의 명백한 적성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정부가 제지했고 연세대 대학생들로 구성된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의 헝가리 진입은 실패했다. 당시 한국에서 여권은 사회 고위층만 가지고 있었던데다 해외로 출입국하는 것 자체가 자유롭지 못해 통제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공산국가로 민주화 운동을 위해 총들고 싸우러 가는 행위가 이승만 정부의 눈에는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국가를 민주화시키기 위해 간다는 것은 반공정신이 투철해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젊은 학생들의 의기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이어 독재를 운운하기 이전에 정상적인 국가라면 국민이 남의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겠다 할 때 못 가게 막는 것이 정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66년이 지난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국제 용병으로 이근 대위를 비롯한 한국인 몇 명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참여한 것도 그 보다 앞선 1956년에 이와 같은 시도가 이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만 해도 ISIS에 대항하는 쿠르드족 민병대에 가담했던 한국인이 강제로 한국에 끌려와 여권을 압수당하는 조치를 당했었던 캐이스 또한 존재하기도 했다. 거기에다 서방 국가들도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한국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한국에서 괜히 소련을 자극하는 행위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이 의용군 멤버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유재건 변호사는 후일 헝가리가 민주화되었을 때 헝가리 정부로부터 각기 '십자대훈장'과 '십자중훈장'을 수여 받았다.

한편 시인 김춘수는 헝가리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듣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로 피해를 입은 헝가리 시민들을 추모했다. 당시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15세의 소녀병 셀레시 에리카(Szeles Erika)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혹시 에리카를 염두해 둔 것이 아니냐는 평이 있었다. 한 때 이른바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반공을 촉구한 시로 평가 절하 당하기도 했으나, 요즘에는 깊게 연구되는 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헝가리 혁명 60년 기념 특별 사진전에서는 에리카의 사진 옆에 김춘수가 당시에 쓴 시를 같이 전시했다. 그리고 한 예술가가 소녀 에리카를 사진 예술로 승화시킨 적이 있었다. 이 사진에 나타나는 낫과 망치의 유무는 현재 민주화 된 헝가리의 상황과 대조되는 세월이 느껴지고 있다.

민주화 시위 60주년을 맞은 2016년, 헝가리 현지 보드게임 회사가 당시 민주화 시위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보드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목은 <분노의 날들 : 부다페스트 1956(Days of ire : budapest 1956)>으로 당시 민주화 시위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 장소들을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혁명 당시 불렀던 'Avanti ragazzi di Buda (일어나라 부다)'라는 노래는 현재 이탈리아 세리에A 소속의 축구클럽인 SS 라치오가 응원가로 사용하고 있다. K리그에서도 FC 서울과 포항 스틸러스가 원곡에서 음을 살짝 바꿔 만들어 쓰고 있다. 헝가리 민주화 시위의 의의를 보자면 좌우 세력 모두에게 상당한 왜곡을 받았던 사건이기도 했다. 우익 측에서는 사건을 반공 의거 정도로 취급하며 시위대에서 노동 계급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반대로 스탈린주의 좌익진영에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물든 반(反) 혁명 운동으로 매도하고 있는 입장이다.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적 입장에 의거한 반(反) 스탈린 봉기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당시 시위대는 스탈린의 동상을 파괴하고 침을 뱉기도 했지만, 레닌주의 저작들도 모아서 불태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단순히 반(反) 스탈린 봉기로만 보기는 어렵다. 이를 주시하고 있었던 서방 좌파 사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자신의 패권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불법 침공으로 유혈 진압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존재했다. 당시 많은 좌익들이 공산주의에 실망하여 우익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중에 영국 공산당원(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들은 탱크를 보내 진압하라며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했고 이 때 이들을 비하하는 탱키(Tankie)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오늘날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극렬 좌익들을 비판하는 용어로 남아 사용되고 있다. 

헝가리 시민들을 탱크로 잔혹하게 진압하는 것에 공개적으로 찬성을 표했던 영국 공산당은 이와 같은 행위들로 인해 영국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이미지가 폭락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때는 이를 비난하는 등 어느 정도 교훈을 얻었으나 이와 같은 소련의 행위를 적극 찬성하고 주도했던 스탈린주의자 극렬 좌파들은 프라하의 봄 당시의 소련의 강제 진압 행위까지도 옳다고 주장하는 등 끝까지 소련의 강경노선에 대해 찬성하며 빈축을 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유럽에서는 유럽 공산주의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한편 민주화 운동 후반기에 시위대가 망명을 목적으로 T-54A를 끌고 영국 대사관으로 들어왔는데, 이 사건으로인해 T-54A를 입수한 영국군 관계자들은 이 전차가 당대의 서방의 전차보다 우월한 파괴력을 지닌 것에 충격을 받았고, 기능의 열세를 타개하기 위해 로열 오드넌스 L7 105mm 전차용 강선포가 개발되었다. 

당시 영국군의 최신 주력전차였던 센추리온 전차 Mk. 5가 각각 전면 상부 장갑이 120mm으로 강화된 Mk. 5/1, 주포가 20파운더에서 L7A1으로 변경된 Mk. 5/2로 개량되었고 두 개량점이 합쳐진 Mk. 6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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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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