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를 사랑한 13세 소년에게 주어진 80일

김성호
김성호 인증된 계정 · 좋은 사람 되기
2024/04/29
시간은 가장 냉엄한 심판자다. 더없이 화려한 성취도 시간 앞에선 퇴색되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영광은 보잘 것 없는 소동이 되고, 어느 성공은 도리어 야비한 술수의 결과로 드러난다. 걸작이라 평가됐던 작품이 완전히 잊히는 것도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다. 잔뜩 휘저어진 흙탕물을 말끔히 정돈하듯, 시간은 남겨질 것과 사라질 것을 가름하는 가장 권위 있는 심판자로서 제 역할을 완전히 수행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끌어내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재평가되는 작품도 있다. 당대 시장에선 외면 받았으나 훗날 그 가치가 인정돼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경우다. 시간 앞에 퇴색돼 그 매력이 사라지는 작품이 여럿이라지만, 몇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력만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이런 작품을 대면하자면 왜 그때는 몰랐을까 하는 한탄이 절로 새어나오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걸작들이 당대의 성공작을 훌쩍 뛰어넘는 가치로 평가되는 것도, 초판도 팔지 못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거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의 사례 또한 유명하다.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퇴색되지 않는 무엇, 작품이 영속하는 생명력을 얻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소년, 천국에 가다 포스터 ⓒ 청어람

당대엔 실패했지만 기억되어 마땅한

<소년, 천국에 가다>는 2005년 개봉해 고작 20만 명의 관객이 든 영화다. 명실공히 충무로 대표배우로 거듭난 박해일과 염정아가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흥행참패였다.

영화는 평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아이가 하룻밤에 어른이 된다는 설정은 이미 할리우드 성공작 <빅>이 그려낸 바 있고, 미혼모를 향한 아이의 짝사랑 역시 그다지 새로운 착상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진 탓이다. 여기에 더해 시골과 동심, 막무가내 판타지란 설정이 식상하고 지루하단 이미지까지 빚어내며 당대 관객 또한 영화를 외면하였다. 그리하여 영화는 오랫동안 어디서도 거론되지 못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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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서평가, 작가, 전직 기자, 3급 항해사. 저널리즘 에세이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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