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리뷰 ] '울산 디스토피아 -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2024/03/30
*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6855883
(이 리뷰는 출판사 '부키'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썼으며, 여기 외에 알라딘 페이지에도 올라갑니다.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내 경력부터 대략 언급해야 이 리뷰 및 책을 이해하는 데 공정할 것이다. 대략 30년 전 수도권의 화학 회사 연구소에 입사해서, 10여 년 동안 울산의 공장에 수시로 출장을 다녔다. 그 후 약 10년 동안은 관계 분야의 회사에 다니면서 울산을 비롯한 전국의 연구소 및 생산 사업장에 출장을 다녔다. 내 기억으로는 업무 관계로 울산의 생산 업장에 출장을 간 것은 2017년 정도가 마지막이다. 출장 외에, 재작년엔 수 개월 정도 생산 공장에 가까운 작은 연구소에서 일할 기회가 있어서 지역 생산 입지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이 책 대부분이 너무 익숙한 내용이라 당연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그것이 한국 산업 도시의 문제라 하겠다. 나는 긴 시간 동안 산업계의 분위기 변화를 읽어 왔는데, 내가 처음 일한 업체는 현재 그리고 일하던 도중에도 그리 '잘 나가는'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책에서 언급하는 변화들을 더 심하게 겪었다 - 현장 인력의 고착화 및 노령화, 매우 적은 신규 인력 채용, 현장의 연구 능력과 know-how 상실 등등. 이제 모든 중요 결정 및 기술적 발견은 수도권 및 거기서 근무하는 인력들이 하고, 현장의 의견은 이들을 구현할 때 참고하는 이상으로는 활용되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 이 책에서 배운 가장 재미있었던 점은 부울경 거주 젊은 세대의 의견이었다. 연령상 내가 쉽게 얻기 힘든 정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책 및 사회 분위기를 이들이 어떻게 보는가?[1] 그리고 지역의 대학들, UNIST와 부산대, 울산대 등이 울산 현지 근무자들에게 적절한 지식을 창출하는가. 화학 공장에 근무했던 경험으로 보아, 현재 화학 공장에서 산업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지식을 이들 대학의 교수들이 대학원에서 전해 줄지는 의문이다. 대학원에서는 소위 논문을 낼 수 있는 '최첨단'의 지식이 의미가 있지, 더 이상 장비 혹은 큰 규모의 산업 설비를 운용하는 데 필요한 '올드한' 지식들이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2] 책에서는 이 점을 잘 설명한다. UNIST의 논문 품질은 좋고 교수 연령도 젊으나, 이것이 주변 산업체와 적극적으로 연계되어 인력을 공급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3] 산업체 입장에서는 이들의 교육은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고급 인력에게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공장에 별반 도움이 안 되고, 어차피 공장에는 능력 있는 엔지니어를 더 배치할 유인이 별로 없다.
한국은 크기가 작고, 현대의 지상 교통 수단은 제 2의 도심인 부울경까지 가는 시간도 2시간 남짓으로 줄였다. 젊은이들에게 훨씬 재미있고, 모든 것이 다 몰려 있는 서울로 젊은 층이 모여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4]. 한국의 인구가 유지되더라도 이 경향을 바꾸기 힘들 텐데, 지방의 새 일자리는 보수가 적기 때문에 주로 외국인 노동자가 맡으므로 개선은 참 난망하다. 말만 듣다가 이를 피부로 느낀 것이 수 개월 동안 지방에서 직접 거주하면서다[5].
그런데 정부에서 이 상황을 개선할 적극적인 동기가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다지 그렇지 못하다.
제조업 내에서 중화학공업의 입지가 줄어들고, 중화학공업 가치사슬 내부에서 울산 사업장의 입지가 줄어들고, 울산 사업장 내부의 노동 시장 이중 구조[6]가 더 악화되는 상황에서 산업도시 울산에 무엇을 기대하고 자금을 투여하거나 투자하겠는가.... 제조업 관점에서 울산에 남은 것은 기존의 설비 투자라는 '매몰 비용'과 기존의 제조업 생태계가 보유한 '일자리' 개수 정도다. 뿌리 기술, 혁신적인 기술 기업, 연구개발 기반 모두 울산의 취약점이다. 심지어 울산의 남성 청년이 정착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울 안정적인 일자리 전망도 없다. 물론 여성 일자리의 전망도 없다. (298p)
이 환경에서 쇠락하는 도시를 어떻게 살려야 하겠는가? 피츠버그(Pittsburgh)와 디트로이트(Detroit)는 어느 도시 경제 서적에서도 주목할 사례로 잘 나오고, 특히 후자는 도시 쇠락의 본보기처럼 언급된다. 요즘에는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미가 보인다는데, 이는 특정 기업의 집중 투자 덕이 크다고 한다.
울산도 이런 기업 혹은 개인이 나오기를 기대해야 할까? 자동차 산업에 도시의 고용이 집중된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산업이 쇠락하자 심각한 위기를 아직까지 겪고 있다. 울산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산업도시란 것 외에는 주목할 만한 업종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마저 위에서 설명했듯이 해당 분야의 의사 결정 기능을 거의 잃어버렸다. 몇 사례에서 보듯이, 수도권에서 결정을 내리면 얼마든지 다른 업체에게 - 해외도 포함 - 팔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군산 GM 공장처럼, 언제든지 타국의 결정에 의해 문을 닫을 수 있다.
이 책의 제안처럼 '지속 가능한 제조업 생산/엔지니어링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독일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단일 유로 통화의 도입 과정에서 갑자기 화폐 가치가 높아진 남동 유럽 국가들 덕이라는 말도 있지만, 독일은 그래도 하르츠 개혁 같은 일을 했다. 어차피 공장의 노조원들 대상으로는 신규 채용이 거의 없으니 기존의 고연령대 노동자[7]가 거의 퇴직하기를 기다려야 할까? 국제 산업 상황이 그 때까지 기다려 줄까? 부울경 사이의 해당 협약 시도는 몇 년 전에 실패했다고 책에서 언급한다.
솔직히 나는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문제들을 끊어 낼 방법들 몇은 제안이 이미 됐지만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이 반기지 않는다. 노동자 이중구조 혁파 및 직무제[8]로 기업이 유연하게 사람을 새로 고용할 수 있도록 풀어놓을까? 아니면 울산 근처 대학들이 공장 운전에 필요한 경험을 쌓도록 학생들을 더 교육해야 할까? 부울경처럼 더 큰 영역에서 협약을 맺어 인재 공급? 피츠버그는 전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업종들에 투자해 도시의 큰 쇠퇴는 어느 정도 피했으나, 산업 고용 인구 비율이 심각하게 감소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저자의 제안처럼 제조업 고도화나 AI, ICT 연계 등으로 나갈 때 현재의 산업 고용인 비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현존하는 공장마저도 극도로 자동화를 이룬 것이 한국이라, 공장은 유지되더라도 고용인 수까지 유지할 수는 없다 생각한다. 조선업체는 많은 현장 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예외일 수는 있으나, 한 번 구조조정 및 '저임금화'가 이미 일어났던 이상 여기에 정착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도시의 성쇠는 빈번히 일어났고, 과거의 쇠퇴는 정치적인 이유 및 교통로 변화 등이 많았다[9]. 서울 인구는 현재 10년째 감소되는데 이는 주택 가격 상승이 크지만, 울산은 크게 그렇다 보기 어려운데도 인구가 몇 년째 감소 중이다. 이는 '좋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유출되는 탓이 크다. 서울은 주변 수도권 인구가 증가하니 감소가 크게 문제가 되진 않더라도, 부울경은 전체가 인구가 감소하므로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 인구는 뭔가 획기적인 대책 없이는 앞으로 감소할 일만 남았다는 점에서, 한 손에 꼽을 만치 역내 평균 소득이 높은 울산마저 인구 감소를 겪고 있는 만큼 장래가 밝다고 말할 수 없다.
漁夫
[1] 내가 재작년에 어느 연구소로 강의를 나간 일이 있는데, 강의에 들어오셨던 젊은 분과 잠시 얘기를 할 시간이 있었다. 내가 놀랐던 점은 이 분이 말씀하신 인국공 논란에 대한 관점이었다. 내가 (섣불리) 생각했던 것과는 온도 차이가 엄청났고, 현 젊은 세대가 보는 '좋은 취업 대상 기업'과 '공정'의 개념이 내 세대와 비겨 얼마나 다른지 편린을 알 수 있었다.
[2] 이는 더 이상 화학 공정 운전이 전세계뿐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hot하다 여겨지지 않는 시대 상황 때문이다. 대부분의 화학 제품들은 중국에서 매우 싼 가격으로 만들고 있을 정도로 범용 상품(commodity)이 된 지 꽤 지났다. 한 예로 폴리실리콘(다결정 고순도 Si)은 태양광 패널의 핵심 소재로, 국내에서는 OCI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새 중국산 저가품에 의해 입지가 위태로울 정도였다가 중국산에 대한 비관세 장벽 덕분에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link).
[3] 젊은 교수들은 실적을 쌓고 수도권 대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산업계와 끈이 탄탄하려면 젊고 회사 경험이 없을 때 오히려 불리하다.
[4]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도 이런 얘기를 젊은이에게 직접 들었다. "서울이 재미있기는 최고다. 무조건 서울로 가서 향후 생활을 하겠다"고. 그런데 이 말을 해 준 사람은 다른 데(부울경 같은)도 아니고 경기 남부가 거주지였다. 서울에서 좀 거리가 되긴 하지만...
[5] 농장 소독 방법 안내 동영상이다(link). 설명이 필요한가?
[6]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 간격이 지속적으로 벌어진 현상. 소위 '3D'는 비정규직에게 저임금으로 시키고, 노조의 협상력을 이용해 업무 강도 및 부담이 덜한 자리는 정규직이 차지했다고 비난받는다.
[7] 고연령 현장 근무자가 연공급에 따라 많이 받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책에서 인용했듯이 '동네 여성들 데려와도 상관없다'는 말처럼 그만큼 생산성을 못 내니 문제인 것이다. 한국은 역사적 문제 때문에 이 문제를 다양한 산업용 로봇을 들여와 대체했으며, 작업자 만 명당 로봇 수는 한국이 단연 세계 1위다(link). 사람이 적은 싱가포르는 그렇다 쳐도, 독일과 일본과 비교해도 2배가 넘는다.
[8] 대체로 특정 직무를 맡아야 연봉이 오르는 제도. 연공급은 직무 연차가 쌓이면 승진이 적더라도 연봉이 오르는데,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와 (반대 방향으로) 대비되는 개념으로 많이 쓰인다.
[9] 로마의 인구는 AD 2세기 중반의 120~150만 부근에서,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6~7세기에는 10만 이하, 최저 2~3만까지 내려앉고, 100만 이상으로 복귀한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다. 팔미라는 동서 교역으로 번창하다가 교통로가 끊기면서 지금은 완전히 폐허만 남았다.
ps. 리뷰 쓰는 김에 편집상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논문 등 학술적 발표로 시작한 주제를 대중서로 낼 때 종종 볼 수 있는 일로, 그래프와 표를 처리한 방식이다.
* 전반적으로 표는 그래프보다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요점을 말로 설명한 후 참고 문헌만 적거나 꼭 넣어야 한다면 그래프로 바꾼다. 이 책은 [무미건조하게 숫자만 들어간] 표가 상당히 많다(e.g. 224p).
* 풀 칼라로 인쇄하지 않을 경우 - 객관성이 중요한 과학 서적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다. 쓰더라도 컬러 페이지를 따로 몇 개 넣을 뿐이다 - 그래프의 선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e.g. 175).
* 여러 자릿수의 숫자를 표시할 때 콤마를 몇 자리마다 찍어야 하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다. 서양식은 세 자리, 우리 나라 방식으로는 네 자리가 적절하다. 나는 114p처럼 후자도 별 거부감이 없으나, 이 책에서는 전자가 훨씬 많다. 섞여 있는 것은 혼란스러우니 통일시켜 줬으면 한다.
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얼마 전 잠시 울산에 업무상 갔다 왔는데, 택시 운전사 분께 좀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이 책을 보시기라도 했나 생각. 한 치도 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