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레터
며칠 전 다녀온 전시에서 중년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첫사랑 이야기를 다룬 인터뷰 영상을 보았습니다.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질문에 ‘나이 오십이 다 되어 그런 걸 물어 뭐하냐’며 머쓱해 하던 이들. 이내 소나기처럼 끝난 소박한 추억을 들려주고는 부랴부랴 ‘그게 다예요, 뭐’하고는 매듭짓더군요. 그 작품은 늘상 관객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짧게나마 주인공의 자리에 놓은 시도라는 의의가 있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영상이 넷플릭스가 아닌 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고 있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되겠죠.

좀 더 잘 팔리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선 보다 화려한 주인공을 택해야 합니다. 19세기 제정 러시아를 살아가는 작가라면 주저 없이 귀족 가문의 젊은 남녀를 택했을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 한국에는 두 부류의 주인공이 있는 듯하네요. 돈이 많거나 똑똑하거나. 예를 들어 ‘호텔 델루나’에선 호텔을 소유한 장만월(이지은 분)과 하버드 경영학과를 졸업한 구찬성(여진구 분)이 주인공으로 선택됐는데, 이는 건조하게 말해 자본가와 능력주의의 몽환적인 사랑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 조국 사태 당시 서울대 학생들의 조국 규탄 집회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 지도층이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이용해 자녀에게 계급을 대물림하고자 했으며, 그 시도는 우리의 노력에 좌절감을 주었다’는 그들의 진단은 정확했으며, 그 정확성 덕에 그들은 떳떳해 보였습니다. 그 집회에 나와 있던 이들의 부모 중 상당수가 교수나 의사, 변호사나 고위 공무원이라는 점은 완벽히 합법이었기에, 그들의 동질적인 배경은 조국 일가의 탈법 앞에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소위 명문대 졸업자의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이젠 정당하고 당연한 현상이 된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웠습니다. 마치 부자 장만월과 엘리트 구찬성이 주인공으로 선택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