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입장에서 본 청일전쟁 개전의 기원
2024/05/16
1894~1895년 사이의 청일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정세 자체를 뒤엎어버린 중대한 사건이었다. 아편전쟁 이래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의 이권을 침탈하며 침략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고 특히 프랑스는 청불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얻어냈지만 정작 그런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동북아 지역 내에서의 지위만큼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1894년 이래 그 지위가 엎어지게 되는데 그 주축은 아편전쟁을 일으켰던 영국도, 청불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강탈한 프랑스도, 하물며 부동항을 찾아 극동으로 남하하는 신흥 강국인 제정 러시아도 아닌 바로 일본이었다. 나는 그래서 이미 청나라의 몰락에 제대로 종지부를 찍은 사건을 하나 꼽자면 아편전쟁도 물론 있겠지만 같은 아시아 국가이자 중국인들이 더 아래로 보던 국가인 일본에게 패한 청일전쟁이 더 중요성이 크다고 본다.
한국에서 청일전쟁의 인식은 매우 간단하게도 그냥 한국이 식민지화되는 것의 시발점이었다는 것 정도로만 형성되어 있다. 또 청일전쟁을 얘기할 때 그나마 한국에서 얘기되는 부분은 갑신정변 속 톈진 조약 문제라던가 임오군란부터 갑신정변을 거쳐 쭉 이어져오던 조선 내부의 혼란 문제 정도일 것이다. 이에 누군가는 일본이 청일전쟁 개전을 안 할 수가 있었는데 굳이 한 이유를 모르겠다고도 하는데 물론 청일전쟁 당시 외부에선 겉모습상의 국력만을 보고 아무리 청나라가 망해가다고 해도 걔네가 지진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리고 또 일본이 조선에 적극적으로 침투를 도모하지 않았다면 청일 개전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던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과연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전쟁은 피할 수 있던 전쟁이었나? 이 글에서는 당시 일본이 결정한 청일전쟁이라는 강경책의 필연성과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번째로 봐야 할 것은 당시 번벌 정치 세력이 위기를 맞이 했다는 것이다. 번벌과 민당의 대립이 벌어지던 중 1892년 8월, 번벌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들어섰으나 사실 번벌 세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