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5편 - 유럽 발트 3국, 에스토니아에서 목격한 러소포비아의 광풍
2024/04/21
작년 겨울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필자는 스웨덴 거리를 지나다가 러시아 대사관을 보았다. 러시아 대사관 앞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수군사작전을 비난하는 각종 팜플렛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그 팜플렛들을 보는 순간, 필자는 한 국가와 국민에 대한 거대한 포비아(Phobia)의 현장을 목격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러한 포비아(Phobia)는 불안장애(Anxiety disorder)의 한 종류이지 전체적인 모든 공포증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특정 상대에 대한 포비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이성을 덮어버릴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작은 강아지가 자기보다 몸집이 큰 상대에게 계속 짖는 행위가 그러한 작은 강아지가 갖고 있는 포비아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에스토니아 뿐만이 아니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모두 갖고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발트 3국에 대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이 폭압적인 지배만 했을까? 발트 3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발트 3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중립국이 된 반면 발트 3국은 소련에 복속되어 공산권 블록에 속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해당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와 같은 단순히 지리적 단어 이상의 국가간 협력체이면서 국제무대에서 서로 간의 입장을 지지하고 동맹이자 한 국가처럼 서로 끈질긴 인연을 과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힌 인연을 발트 의회를 설립하면서 서로 간의 입장은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 도와주는 연맹과 같은 행위를 지속해왔다. 여기에 더해 발트 의회와 북유럽 이사회 또한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더욱 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발트 3국은 북유럽 이사회 산하 기관인 북유럽 개발 은행의 가입국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끈끈한 우정을 가진 국가들 치고는 민족적으로 각각에 다르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의 영향을 받은 우랄 알타이 핀-우그리아계 국가이고 라트비아는 발트 리보니아 원주민들이 건국한 국가이다. 리투아니아는 발트 리보니아와 폴란드인들의 혼혈들이 리투아니아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종교적으로도 서로 다르다. 에스토니아는 무신론자들이 인구대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 갖고 있는 집단이고 그나마 강세가 있는 종교는 정교회가 16%를 차지하고 있기에 가장 비중이 높다 할 수 있다. 라트비아는 스웨덴 프로테스탄트가 30% 이상을 차지한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아 카톨릭이 우세하다. 이렇게 서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른 국가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이 세 나라가 겪은 역사도 다르다. 한 때 폴란드와 연합하여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던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의 경우, 20세기 이전까지 개별적인 국가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대에는 부족국가나 군장국가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국가' 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고 중세시대에는 리보니아 연맹이 존재했지만 주축이 독일 기사단이었기에 독립적인 형태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덴마크, 스웨덴의 직접적인 직할통치도 받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직할통치를 받은적도 있다. 그러한 역사를 겪은 뒤,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급성장하면서 발트 3국 또한 이 영향으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어도 유럽과 가까웠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가장 유럽화가 잘 된 지역이었다. 그리고 다른 러시아의 영토들에 비해 경제적 수준, 문화적 수준도 훨씬 뛰어났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발트 지역을 집중적으로 키워줬다. 그리고 상대적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중근세 시기에는 이 지역이 외적의 침입을 받은 것도 드물었기에 이 발트 3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에 대해 상당히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아마 소련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들 발트 3국은 러시아에 대해 평생 고마워했을지도 모른다. 스위스 출신 언론인 기 메탕(Guy Mettan)의 책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에 의하면 "발트 3국인 자신들이 불안하다 여긴다. 소련이 나타나기 전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환영했다. 그러나 소련이 나타나면서 이들의 자유는 공산주의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현 러시아는 과거 소련의 환생이라 보는 이유는 권좌에 오래 올라와 있던 푸틴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발트 3국이 소련 시대 때 딱히 이들이 제한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치 독일에 부역해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참전했던 것도 이들은 히틀러에게 독립에 대한 약속을 보장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광기 어린 히틀러가 그 약속을 지켜줄리 만무했겠지만 이들은 최소한 그걸 믿으며 소련 침공에 합류했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황이 뒤집히며 소련이 역공에 나서자 발트 3국은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이들을 존중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승인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자유를 제한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트 3국은 소련의 공업화가 아주 잘된 곳이다. 게다가 서구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도 일부 허용해주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서유럽이 어떤 문화가 유행을 타고 있는지 당시 소련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발트 3국으로 오면 대충 어떤 유행을 타고 있는지 감이 왔다고 했다. 발트 3국은 소련 시대에도 서유럽 문화의 영향도 받았고 그에 대한 통제가 그나마 완화된 곳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 가장 먼저 독립했다. 이들이 독립한 이유는 자유에 대한 열망보다는 경제적으로 소련이 침체할 때 그나마 나았던 발트 3국의 경제력을 수탈해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에 퍼줄 것을 염려해서인 것이 가장 강했다. 그러려면 발트 3국은 시민들이 소련 전체의 경제력에 희생될 것을 우려하여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50주년 기념일에 세 나라의 수도인 탈린, 리가, 빌뉴스를 잇는 678km에 이르는 인간띠를 형성해 독립 시위를 벌였다. 1990년에는 이 지역의 소비에트에서는 독립파가 다수를 차지해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여 절대 다수의 찬성을 얻은 이후 자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물론 소련은 초기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실제로 리투아니아에서는 유혈 사태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은 이들의 독립을 인정했다. 발트 3국은 역사적인 측면을 봐도 정교회권인 러시아나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보다는 그 전에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독일 등의 영향을 받은 기간이 더 길다.
그런데도 러소포비아가 강력한 이유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환멸과 자유에 압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련은 붕괴되었지만 러시아는 항상 잠재적인 적국으로 간주했다. 1990년대의 혼란기에 러시아인들이 상당수가 빠져나갔음에도 러시아인 인구비율이 여전히 상당하다. 특히 러시아와 인접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경우, 전국민 4명 중 1명이 러시아 민족일 정도이고 각국의 수도인 탈린, 리가와 각국 동부 지역에 많이 모여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세계 최대 영토를 가진 국가도 세계 2위의 국방력을 가졌다. 게다가 푸틴은 23년 동안 집권하고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발트 3국은 러시아가 강성해진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유가 소련이 밀고 들어왔던 것처럼 러시아가 밀고 들어 오려는 것이 아니냐는 잠재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특수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발트 3국을 밀고 들어왔던 1940년의 소련처럼 느껴지고 있기에 그에 대한 트라우마의 동질감 때문이다.
그러나 발트 3국은 러시아를 특별히 적대하지 않는한 큰 문제는 없다. 그들은 러시아를 무서워하면서도 러시아의 경제교류를 다른 국가들에 가장 많이 해왔고 알게 모르게 러시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발트 3국이 동유럽에서 가장 경제 발전 속도가 빠르고 GDP가 높은 것도 러시아 제국시대부터 소련 시대까지 집중적으로 키워줬기 때문에 그 기본을 바탕으로 했다. 오히려 러시아의 다른 점령지보다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국가들이었다. 그럼 이같은 러소포비아를 갖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한 심리적인 압박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좀더 둘러보고 난 다음에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만 말이다.
발트 3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중립국이 된 반면 발트 3국은 소련에 복속되어 공산권 블록에 속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해당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와 같은 단순히 지리적 단어 이상의 국가간 협력체이면서 국제무대에서 서로 간의 입장을 지지하고 동맹이자 한 국가처럼 서로 끈질긴 인연을 과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힌 인연을 발트 의회를 설립하면서 서로 간의 입장은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 도와주는 연맹과 같은 행위를 지속해왔다. 여기에 더해 발트 의회와 북유럽 이사회 또한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더욱 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발트 3국은 북유럽 이사회 산하 기관인 북유럽 개발 은행의 가입국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끈끈한 우정을 가진 국가들 치고는 민족적으로 각각에 다르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의 영향을 받은 우랄 알타이 핀-우그리아계 국가이고 라트비아는 발트 리보니아 원주민들이 건국한 국가이다. 리투아니아는 발트 리보니아와 폴란드인들의 혼혈들이 리투아니아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종교적으로도 서로 다르다. 에스토니아는 무신론자들이 인구대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 갖고 있는 집단이고 그나마 강세가 있는 종교는 정교회가 16%를 차지하고 있기에 가장 비중이 높다 할 수 있다. 라트비아는 스웨덴 프로테스탄트가 30% 이상을 차지한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아 카톨릭이 우세하다. 이렇게 서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른 국가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이 세 나라가 겪은 역사도 다르다. 한 때 폴란드와 연합하여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던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의 경우, 20세기 이전까지 개별적인 국가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대에는 부족국가나 군장국가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국가' 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고 중세시대에는 리보니아 연맹이 존재했지만 주축이 독일 기사단이었기에 독립적인 형태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덴마크, 스웨덴의 직접적인 직할통치도 받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직할통치를 받은적도 있다. 그러한 역사를 겪은 뒤,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급성장하면서 발트 3국 또한 이 영향으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어도 유럽과 가까웠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가장 유럽화가 잘 된 지역이었다. 그리고 다른 러시아의 영토들에 비해 경제적 수준, 문화적 수준도 훨씬 뛰어났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발트 지역을 집중적으로 키워줬다. 그리고 상대적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중근세 시기에는 이 지역이 외적의 침입을 받은 것도 드물었기에 이 발트 3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에 대해 상당히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아마 소련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들 발트 3국은 러시아에 대해 평생 고마워했을지도 모른다. 스위스 출신 언론인 기 메탕(Guy Mettan)의 책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에 의하면 "발트 3국인 자신들이 불안하다 여긴다. 소련이 나타나기 전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환영했다. 그러나 소련이 나타나면서 이들의 자유는 공산주의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현 러시아는 과거 소련의 환생이라 보는 이유는 권좌에 오래 올라와 있던 푸틴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발트 3국이 소련 시대 때 딱히 이들이 제한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치 독일에 부역해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참전했던 것도 이들은 히틀러에게 독립에 대한 약속을 보장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광기 어린 히틀러가 그 약속을 지켜줄리 만무했겠지만 이들은 최소한 그걸 믿으며 소련 침공에 합류했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황이 뒤집히며 소련이 역공에 나서자 발트 3국은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이들을 존중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승인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자유를 제한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트 3국은 소련의 공업화가 아주 잘된 곳이다. 게다가 서구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도 일부 허용해주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서유럽이 어떤 문화가 유행을 타고 있는지 당시 소련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발트 3국으로 오면 대충 어떤 유행을 타고 있는지 감이 왔다고 했다. 발트 3국은 소련 시대에도 서유럽 문화의 영향도 받았고 그에 대한 통제가 그나마 완화된 곳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 가장 먼저 독립했다. 이들이 독립한 이유는 자유에 대한 열망보다는 경제적으로 소련이 침체할 때 그나마 나았던 발트 3국의 경제력을 수탈해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에 퍼줄 것을 염려해서인 것이 가장 강했다. 그러려면 발트 3국은 시민들이 소련 전체의 경제력에 희생될 것을 우려하여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50주년 기념일에 세 나라의 수도인 탈린, 리가, 빌뉴스를 잇는 678km에 이르는 인간띠를 형성해 독립 시위를 벌였다. 1990년에는 이 지역의 소비에트에서는 독립파가 다수를 차지해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여 절대 다수의 찬성을 얻은 이후 자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물론 소련은 초기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실제로 리투아니아에서는 유혈 사태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은 이들의 독립을 인정했다. 발트 3국은 역사적인 측면을 봐도 정교회권인 러시아나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보다는 그 전에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독일 등의 영향을 받은 기간이 더 길다.
그런데도 러소포비아가 강력한 이유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환멸과 자유에 압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련은 붕괴되었지만 러시아는 항상 잠재적인 적국으로 간주했다. 1990년대의 혼란기에 러시아인들이 상당수가 빠져나갔음에도 러시아인 인구비율이 여전히 상당하다. 특히 러시아와 인접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경우, 전국민 4명 중 1명이 러시아 민족일 정도이고 각국의 수도인 탈린, 리가와 각국 동부 지역에 많이 모여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세계 최대 영토를 가진 국가도 세계 2위의 국방력을 가졌다. 게다가 푸틴은 23년 동안 집권하고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발트 3국은 러시아가 강성해진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유가 소련이 밀고 들어왔던 것처럼 러시아가 밀고 들어 오려는 것이 아니냐는 잠재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특수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발트 3국을 밀고 들어왔던 1940년의 소련처럼 느껴지고 있기에 그에 대한 트라우마의 동질감 때문이다.
그러나 발트 3국은 러시아를 특별히 적대하지 않는한 큰 문제는 없다. 그들은 러시아를 무서워하면서도 러시아의 경제교류를 다른 국가들에 가장 많이 해왔고 알게 모르게 러시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발트 3국이 동유럽에서 가장 경제 발전 속도가 빠르고 GDP가 높은 것도 러시아 제국시대부터 소련 시대까지 집중적으로 키워줬기 때문에 그 기본을 바탕으로 했다. 오히려 러시아의 다른 점령지보다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국가들이었다. 그럼 이같은 러소포비아를 갖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한 심리적인 압박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좀더 둘러보고 난 다음에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만 말이다.
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