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 출근길] 서울의 달, 스무 살의 나와 아버지

유철현
유철현 인증된 계정 · 편의점 홍보맨
2024/05/13
경남 거창의 한 농촌에서 자란 아버지는 약관의 나이에 부산으로 왔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경제 부흥의 바람을 타고 일자리, 돈자리, 밥자리를 찾아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갈수록 궁핍한 농촌의 현실은 청년들의 원치 않는 이촌향도(離村向都)를 더욱 가속화 시켰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뒤흔든 인구 대이동에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천한 노동력만이 생존의 유일한 밑천이던 시절, 그 당시 새마을운동은 그들에겐 고향을 등지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말 그대로 새마을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다. 아버지가 부산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고향이랑 가까워서였다. 떠나올 때만 해도 언젠가 곧 다시 돌아갈 곳이라 생각했기에..

부산에 입성한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 마을이었던 영도에 터를 잡았다. 시골의 손바닥만 한 밭을 판 돈으로 비탈진 산복도로 다세대 주택에 세를 얻었다. 새로운 지면에 청춘의 뿌리를 내렸으나 스무 살 시골 청년의 눈앞엔 화려한 꽃길 대신 불투명, 불안정, 불확실의 불길만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되어야 했고 당장 내일, 한 달, 일 년 먹고사는 일을 걱정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그때를 회상하며 잘 살아 보자는 욕심은 언감생심, 내 한 몸 누일 방 한 칸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고 말했다. 우울할 겨를 없이 어떻게든 맨몸으로 부딪히며 바득바득 살아내야 했던 날들이었다고.. 매년 돌아오는 겨울이 그렇게 추울 수 없었다고..

“나는 서울로 갈끼다. 대학.”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굳이 도치법까지 쓴 이유는 그만큼 내가 굳은 결심을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님 품을 떠나거나 고향인 부산을 벗어나겠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나는 겁도 많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편이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지로 간다는 건 나의 기질과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릴 적 한없이 높아만 보였던 아버지의...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 BGF리테일 입사(2010년) - BGF리테일 홍보팀 언론홍보 파트 수석(2012년~현재) - 공인중개사(국토교통부), 가맹거래사(공정거래위원회), 경영지도사(중소벤처기업부) 자격 보유 - 편의점 에세이 <어쩌다 편의점> 저자
7
팔로워 29
팔로잉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