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수급자는 의심하고 재벌은 맹신하는 국가 (장혜영)

토론의 즐거움
토론의 즐거움 · '즐거운 토론'을 지향합니다.
2023/03/06
필자 : 장혜영 (국회의원, 토론의 즐거움 멤버)

누군가에게 사적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해본 적이 있는가? 한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사람들은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것이다. 어떤 말로 사정을 설명해야 설득력이 있을지, 이런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내가 구차해보이지는 않을지, 혹시라도 거절 당하지는 않을지, 결국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보면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든다. 그러다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정말 막막하다.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은 삶의 의욕을 증발시킨다.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여러 어려움을 매번 사적으로 헤쳐나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공적 지원체계를 만들고 발전시켜왔다. 이제 사람들은 여러 공적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어려움을 공적으로 증명한다. 문제는 이 증명과정이 지나치게 공급자 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함과 동시에 수요자의 존엄을 침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기초수급자격증명과정의 가족관계 해체사유 증명이다. 정상가족의 해체가 기정사실화되는 2023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초수급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를 받기 위해 여전히 ‘부양의무제’의 벽을 넘어야 한다. 수십년간 왕래가 끊긴 부모, 자식, 부부라 해도 그들에게 일정한 소득과 재산이 있는 한 나는 기본적으로 수급대상이 되지 못한다. ‘가족관계 해체사유서’를 작성할 경우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이 해체사유서는 부양의무자와의 가족관계 해체시점과 해체사유를 상세히 요구한다. 차오르는 설움을 참고 성실하게 서식을 채워넣어도 마지막 관문이 남는다. 부양기피사유가 적합하지 않으면 지급된 수급비를 나중에 부양의무자에게 징수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에 동의해야 한다. 행여 내가 받은 수급비가 관계가 끊어진 가족에게 청구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 앞에 많은 이들은 기초수급을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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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규(<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박권일(<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신혜림(씨리얼 PD), 이재훈(한겨레신문사 기자), 장혜영(국회의원), 정주식(전 직썰 편집장)이 모여 만든 토론 모임입니다. 협업으로서의 토론을 지향합니다. 칼럼도 씁니다. 온갖 얘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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