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06편 -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상, 중, 하로 나누어 연재), 냐싱베 에야데마(Gnassingbé Eyadéma, 1967~20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5/29
오늘 시작되어야 할 서아프리카의 국가 토고의 총선이 29일로 연기되었다. 토고 정부는 11일 각료 회의 후 성명에서 총선 및 지방선거일은 4월 29일 월요일이라 밝혔다. 토고 총선은 애초에 내일 13일부터 시작해 20일 시작되는 지방선거와 함께 치를 예정이었으나 지난 달 25일 의회에서 통과된 헌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자 정부가 개헌 안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며 연기를 선언했다.
사진 : 1975년 파리에서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와 함께 있는 냐싱베 에야데마(Gnassingbé Eyadema) 대통령, 사진출처 : Republicoftogo.com : Gnassingbé Eyadema : le parcours d'un homme d'Etat

물론 이와 같은 개헌 안은 대통령을 직접 선거가 아닌 의회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고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1년 늘리는 대신 단임제로 바꾸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물론 야권은 이 개헌 안이 현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꼼수라 주장하며 냐싱베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안 서명 보류를 요구했지만 개헌안을 추가로 재논의하라며 다시 의회로 돌려보냈다. 

야권은 이와 같은 개헌 안이 2025년 대선을 앞둔 냐싱베 대통령이 여당이 장악한 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돼 2031년까지 통치할 수 있는 길을 열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물론 현 포르 냐싱베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조기 대선을 치르고 대선에 당선되면 2030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사실 냐싱베 가문은 프랑스에서 꽂아 놓은 일종의 서아프리카에서 "트로이 목마" 나 다름 없는데 냐싱베 가문의 집권에 따라 서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내려온 프랑스가 베넹, 가나,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기니, 기니비사우 등의 서아프리카 해안 지대 소국들을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처럼 친러로 돌아선 국가들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삼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이 무려 50년 넘게 통치하고 있는 냐싱베 가문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토고는 한국의 절반 정도 면적에 인구 926만여  명의 소국으로 서아프리카 가나와 베냉 사이에 있는 국가다.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의 쿠데타로 집권한 에야데마 냐싱베(Gnassingbé Eyadéma) 전 대통령이 2005년 2월 사망할 때까지 통치한 데 이어 같은 해 아들 냐싱베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후 부자간 57년째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냐싱베(Gnassingbé) 가문은 본래 프랑스계 개신교 신자인 카바이족 하층민 출신이다. 카바이족은 프랑스에 의해 수탈을 당하며 고초를 겪고 있었을 때, 냐싱베의 부친인 에야데마(Eyadéma)가 프랑스에 저항했다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프랑스군에게 맞아죽었다. 

냐싱베 에야데마는 본래 이름이 에티엔 에야데마(Étienne Eyadéma)였다. 그는 고향의 복음주의 학교를 다닌게 학력의 전부였고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에티엔은 고향 서쪽의 바사르 지역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군인이 되는 것만이 비참한 생활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프랑스로 건너가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고, 1960년에 토고가 독립한 후에는 니제르와 베냉에 주둔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육군 중사에 오르고 나서 외인부대가 해체되자 토고로 돌아와 자국 군대의 장교로 군부 인생을 시작한다. 

마침 토고에는 프랑스군에 입대해 활약했던 장성 포함 군인들이 626명이나 존재했다. 다른 프랑스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동원 해제된 프랑스 군인 출신 인사들을 새로운 고국 군대에 포함시키는게 일반적이었지만 토고는 이전 식민지 권력에 봉사한 용병이라 판단하여 자국 군대 편입을 거부했다. 당시 이를 거부한 요인으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 이는 토고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실바누스 올림피오(Sylvanus Olympio, 1902~1963)가 국가 발전과 현대화에 있어 군대가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올림피오는 프랑스군 출신 장성들과 장교들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실제로 올림피오는 군인이 250명 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토고 군의 인원 수를 250명으로 정했다. 심지어 올림피오는 독립 후의 토고는 군대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군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 프랑스의 은연중인 내정 간섭까지 불편하게 여기던 올림피오의 실책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지만 이웃 국가인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 1972)가 군을 강화하여 토고의 국경을 침공하는 사례가 이어지자 그의 위협이 우려되며 그나마 최소한의 군대를 두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에 배속되어 있다가 소집 해제 된 이후, 토고의 전직 군인이 된 자들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더불어 올림피오가 소외시켰던 북부 사헬 지역의 토고 영토의 주민들의 불만이 강화되면서 에티엔은 프랑스군 출신 인사들과 함께 쿠데타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1963년 1월 13일에 에티엔은 상사 계급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올림피오 대통령을 축출시켰다. 이 쿠데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 내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였다.

에티엔은 수도 로메의 미국 대사관 정문 앞에서 자신의 상관이자 전직 대통령인 올림피오를 직접 총살했다. 처음 에티엔은  1967년에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이 올림피오를 살해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리고 이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르몽드 신문을 토고 내에서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말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피오 총살에 대해 언급하여 자신이 직접 살해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그러면서 같은 친프랑스 인사인 니콜라스 그루니츠키(Nicolas Grunitzky, 1913~1969) 전 총리를 대통령에 추대했다. 그루니츠키는 부친이 독일인인 흑백혼혈 출신이다.  1946년에 창당된 토고진보당(PTP)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반프랑스 성향과는 매우 적대했으며, 1951~1958년까지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그는 올림피오 초대 대통령의 처남이기도 했다. 이후 1965년에 에티엔은 중령 계급으로 진급하여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고, 1966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토고군의 군인 수는 쿠데타 직후인 1963년 5월에는 550명에 불과했지만 에티엔의 노력으로 1966년 1월에는 1,200명까지 크게 늘었다. 더불어 같은 해에 토고 남부인을 중심으로 하는 토고통일당 지지자들에 의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자 이 때부터 에티엔과 그루니츠키와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그루니츠키가 자신을 올림피오 대통령 살해 혐의로 소추할 것을 두려워한 에티엔은 이 시위에 대해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루니츠키의 통치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서 시민들은 군부가 권력 장악하는게 낫다며 쿠데타를 종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67년 4월 14일에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추대한 그루니츠키를 몰아낸 후 프랑스로 추방시켰다. 이후 그루니츠키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 교통사고로 인해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69년 9월 27일에 사망했다. 이어 같은 해, 4월 15일 대통령, 정부 수반, 국방부 장관에 등극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토고 북부 카바이족 하층민 소작농 출신이 토고의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가 된 셈이다. 

이후 토고의 대통령 에티엔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든 의회 정당을 해산했다. 집권 초, 에티엔의 학력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을 감안, 행정 경험 또한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아프리카 수석 고문 자크 포카트(Jacques Foccart, 1913~1997)에 연락해 그의 지시를 받아 토고를 통치했고, 이 때문에 포카트는 '전화로 토고를 통치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어쩌고 보면 프랑스가 절대적으로 에티엔을 밀어줬기 때문에 두 번의 쿠데타를 자행하고도 비판 하나 제대로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프랑스가 서아프리카 소국들에게 만들어 놓은 "트로이 목마" 같은 자였던 것이다. 더불어 1969년에는 나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인 토고 인민 집회(RPT)를 만들었으며 1972년 1월 9일에 99.9%라는 북한의 김정은도 울고 갈 정도의 찬성표로 얻은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79년과 1986년에 단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재선했으며 물론 이 선거들은 반대표가 거의 없는 부정선거인 것은 확실하다. 

1979년 12월 30일 선거는 투표율이 99.45%에 달한 것은 물론 1,296,851명의 투표자 중 무효 / 공백표를 낸 단 267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무려 99.98%였다. 이후 1986년 12월 21일 선거 역시 투표율은 98.93%에 달한 데다가 1,738,611명의 투표자 중 840명이 무효 / 공백표를 냈어도 찬성율이 99.95%다. 이것도 토고 현대 역사상 근소하게 떨어졌다고 평가할 정도니 그냥 선거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일당제 하의 국회의원 선거 역시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에티엔은 친척과 그의 부족인 카바이족 지지자들이 장악한 자신의 충성스러운 군대, 프랑스 등 집단 서방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다. 에티엔 에야데마 시기의 토고는 샤를 드골로부터 자크 시라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의 대 아프리카 정책의 선봉이자 하위 지역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며 절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에티엔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친구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렇게 자신의 일족을 요직에 앉혀 놓고 비민주적인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서아프리카의 민주화는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가의 빈약한 경제 자원에 대한 접근을 영리하게 차단하면서 대규모적인 억압은 하지 않고 매우 교묘하게 이를 이용해 정적을 숙청하는 식으로 토고를 강한 경찰 국가로 만드는 등의 수법을 이용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나이지리아의 야쿠부 고원(Yakubu Gowon) 대통령과 회담하여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의 설립을 추진했다.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는 나이지리아 야쿠부 고원 대통령과 당시 에티엔 에야데마, 현 냐싱베 에야데마가 공동으로 창립한 단체다. 이 또한 프랑스를 비롯한 집단 서방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 그로 인해 프랑스와 집단 서방은 비교적 합법적으로 현재까지 서아프리카를 착취할 수 있었다. 당시 에티엔은 야쿠부 고원이 일으킨 나이지리아 내전 기간 동안 발생한 비아프라 미승인 공화국을 정복하고 합병하는 것을 인정했으며 나이지리아와 코트디부아르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서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1975~1978년에 초대 의장이 되었고, 이후에도 1980~1981, 1999년에 2차례 더 의장직을 역임했다. 1974년 1월 24일에 에야데마와 그의 정치적, 군사적 측근 3명, 조종사 1명을 태운 C-47 기체가 토고 북부 사라카와 마을 근처 숲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 사고로 다른 탑승객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에티엔 1명만 홀로 생존했다. 그것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남았기 때문에 에티엔은 이 생존을 '신비로운 힘'의 덕택으로 돌리고 사고가 난 1월 24일을 '경제 해방의 날'로 선언한 이후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에티엔'에서 자기 일족의 언어인 카비아어로 '용기'를 의미하는 '냐싱베'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냐싱베 가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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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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