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153편 -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갈등의 원인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분리 독립 요구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5/18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갈등은 벨기에의 언어로 분리된 지역 갈등이나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영어권의 갈등 그리고 스페인의 민족적 지역 갈등에 비하면 그 원인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캐나다의 프랑스어권과 벨기에-네덜란드어권의 민족주의 운동은 언어 차별이 큰 원인 중에 하나였다. 스페인 내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탄압이 원인 중 하나이다.
사진 : Bruce와 Bohun, John Duncan, 1914, ; King Edward I 'Longshanks'와 함께, George Vertue, 1732, Bannockburn 전투, Andrew Hillhouse, 2014, 사진출처 : 영국 스털링 스미스 갤러리

하지만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발호는 1979년 자치권 투표에서 노동당(Labour Party)이 납득할 수 없는 조건을 걸어 투표를 부결시킨 것, 그리고 영국 대처 내각의 집권, 브렉시트로 인한 유로 탈퇴가 촉발하게 된 원인이다. 그 동안 영국 내에소 스코틀랜드 게일어를 배제하는 언어 차별은 존재했지만, 스코틀랜드 측이 이를 빌미로 민족주의 운동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독립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스코틀랜드에는 주류 민족이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달라 독자적인 민족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19세기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자치운동도 아일랜드 자치 운동 및 독립 투쟁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는 북아일랜드 이주를 통해 정착하는 등 영국에 협조적인 면을 많이 보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기 침체로 인해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면서 스코트인들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스코틀랜드가 자치권을 얻는 역사적 과정을 보면 순탄치 않았고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 1912~2005) 내각에서 존 메이저(John Majo) 내각으로 정권이 이양되는 과정에서 노동당과 보수연합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에 대해 앙금이 많이 쌓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 포스팅은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합병 부터 지금까지의 상황과 독립 운동의 원인에 논해보고자 한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면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지만 법적으로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왕국(Rìoghachd na h-Alba)이라는 독립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때까지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과 '스코틀랜드 국왕'을 겸임하던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국은 17세기 후반 전반적으로 "불운한 칠년 (Seven ill years)"이라는 혹독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 7년 동안 스코틀랜드는 엄청난 가뭄과 경제난이 겹쳤고 이 와중에 명예 혁명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던 정치 세력인 자코바이트(Jacobite)와의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내전이 장기화 될 기미를 보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과 도시 자치회들은 대부분이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된다. 

여기서 잉글랜드 왕국이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기는 것을 본 스코틀랜드는 국부의 근원이 식민지에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이 식민지를 건설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다리엔 계획(Darien Plan)이다.  당시에 식민지를 세울 만한 곳은 아메리카뿐이었고, 아메리카는 이미 여러 거대 식민 제국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다리엔(Darien)이었는데 이곳은 북미와 남미 사이에 있으면서 태평양과 대서양간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장악만 해도 아메리카를 왕래할 때마다 통행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운하를 건설하면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 등에도 통행세를 물릴 수 있어 재정이 확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가 갖고 있는 기술로 다리엔에 운하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불어 오지 중의 오지라서 원주민도 거의 없었던 곳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전 재산을 끌어 모아 스코트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다리엔 계획의 실패로 인해 재정이 파산한 스코틀랜드 왕국은 1707년 1월 1일을 기해 잉글랜드와 연합법의 제정하게 되면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란 이름의 연합 왕국의 형태로 변경되었다. 이에 기존까지 동군연합으로 구성되었던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연합 왕국 국왕'이라는 하나의 군주, 즉 잉글랜드의 국왕 아래에서 구성된 각각의 지방이 되어 복속되었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이렇게 잉글랜드에 합병되어 오늘날 영국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스코트인들이 아일랜드의 자치권 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보고 비교하며 아일랜드가 특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를 보고 있던 영국 정부는 내전 발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시민과 아일랜드 시민을 잉글랜드 시민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한 시민법의 실행은 세계대전 등 내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고 질질 끌리기만 했다. 그러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이 몰락함으로써 스코틀랜드 경제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조선과 철강업, 광업 등의 내 중공업이 영국 경제와 함께 처참하게 쇠퇴한다. 이와 같은 중공업의 쇠퇴는 영연방 국가 지원으로 겨우 유지해왔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정당인 SNP 소속 의원이 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영국 정치권에는 위기가 발생했다. 

이에 영국 정치권에서는 논의 끝에 1979년에는 첫 번째 자치권 이양 투표가 있었으나, 노동당이 총 유권자의 40% 이상 동의 조건이 붙으며 좌절되었다. 이에 SNP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책임을 묻기 위해 하원에서 낸 제임스 캘러헌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전원 동의하게 되면서 찬성 311, 반대 310으로 캘러한을 실각시킨다. 이후 선거에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내각이 집권하였는데 보수연합당 내각 시절에는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요구를 사실상 묵살했다. 

또한 대처의 재임기간에 이루어진 대규모 사기업화와 산업 정리로 인해 스코틀랜드 지역의 경제적 몰락은 전체적인 국영기업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마거릿 대처의 임기 말기인 1989년에는 인두세를 영국 내에서 스코틀랜드에 가장 먼저 적용했다. 그러자 그동안 잉글랜드의 지지부진한 대처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여론은 폭발했다. 이후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가 가결됨으로써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노동당은 스코틀랜드가 자치권을 가지게 되면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자들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자들은 이 틈을 이용해 SNP가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노동당 지지자들의 의석을 대부분 가져오는데 성공한다. 2010년대부터 스코틀랜드 의회와 영국 서민원 스코틀랜드 지역구에서 노동당의 의석은 거의 사라지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SNP의 정치인들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각종 여론조사나 스코틀랜드의 경제 자료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스코트인들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게 되면 경기가 오히려 악화될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의 지지 여론이 많은 이유는 오랫동안 영국 정부가 스코틀랜드의 여론을 무시하고 정책을 집행해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브렉시트에 이은 독립 표결은 스코트인들이 독립하려는 의지를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스코트인들은 140여년의 세월을 거쳐 1998년이 되어서야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지만, 약간 부족했던 노동당의 대처와 영국의 차별 정책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가했던 지나치게 권위적인 보수연합당의 억압, 그리고 이로 인해 여전히 남아있는 영국정부의 정치, 문화적인 배려 부족, 마지막으로 이러한 영국정부의 실정을 비집고 들어온 SNP의 전략이 독립운동의 주요 원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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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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