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대회전, 국민당의 참패

최경식
최경식 인증된 계정 · 역사와 시사에 진심인 작가 겸 기자.
2024/11/20
[4]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선양에 입성하는 중공군.
■랴오선 전역
전세 역전을 직감한 모택동은 1948년 9월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군 전략 수정 및 대규모 전면공세 계획을 수립했다. 앞으로 인민해방군의 전투 방식은 유격전이 아닌 '정규전'이 될 것이며, "국민당을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동북 지역에서의 '대회전'을 예고했다. 이때부터 국공 내전의 양상은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의 전투는 국지적이었고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지 않았다. 이제부턴 국공 쌍방 모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처절한 혈투를 벌이게 될 것이었다. 어느덧, 공격의 때가 왔다고 판단한 모택동은 동북 지역 사령관인 린뱌오에게 '진저우'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이는 뜻밖이었다. 순서상 창춘과 선양을 먼저 점령한 뒤에 진저우를 공격하는 게 상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린뱌오는 진저우 공격에 따르는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다. 우선 베이핑과 가까워 푸쭤이가 지휘하는 화북 지역 국민혁명군에게 공격받을 수 있었다. 또한 진저우는 동북 지역 인민해방군의 근거지인 하얼빈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며, 선양 등에는 국민혁명군의 정예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일단 충분한 병력이 있었으며, 예상치 못한 지점에 대한 공격을 통해 적군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 분위기상 선양 등에 있는 국민혁명군이 섣불리 진저우를 지원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진저우 점령 시, 선양과 창춘에 있는 적군의 퇴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해 동북 전투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린뱌오는 처음엔 모택동의 명을 거부하고 (인민해방군의 오랜 포위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인 창춘부터 공격했지만, 창춘 국민혁명군의 결사항전으로 여의치 않자 진저우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동원된 병력은 약 70만 명이었다.

이번에도 인민해방군은 교묘한 계책을 구사했다. 일부 병력으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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