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의 말줄임표 | 납득할 수 없지만 그게 삶인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들

텍스트 라디오 TMI.FM
텍스트 라디오 TMI.FM · 음악과 콘텐츠로 세상을 봅니다
2022/09/09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남다른 작업물을 만들어 온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대표적으로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가 있다. 1995년 <비포 선라이즈>로 시작한 시리즈는 9년마다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로 이야기를 이어왔는데,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전작으로부터 9년이 흐른 특정한 시간에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영화의 뼈대다. 완결까지 18년이 걸린 셈이다. <보이후드>는 또 어떤가. 아예 12년 동안 한 이야기를 촬영했다. 주연으로 등장하는 6살 아이가 18살까지 성장해가는 이야기. 아이의 누나, 엄마, 아빠도 물론 같은 배우로 12년간 영화를 찍어왔다. 한 소년, 한 가족의 12년이 차곡차곡 쌓여 한 편의 영화로 펼쳐진다.
출처 : 씨네21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3879)

시간의 축적. 링클레이터 감독의 고유한 특징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 ‘비포 시리즈’에는 18년 중 단 3일만 담기고 나머지 시간은 대사로만 설명될 뿐이지만, 시간과 함께 나이든 배우들의 시간을 응축한 연기 덕에 관객은 그 세월을 함께 경험해온 것처럼 영화를 읽게 된다. <보이 후드>는 더욱 분명하게 시간이 축적된다. 약 2시간 40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영화 속 소년이 겪는 12년이라는 세월을 관객은 함께 살아낸다.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주인공들이 조카처럼 느껴지더라는 리뷰는 과언이 아니다. 

두 영화에서 시간의 축적은 그 자체로 개연성이다. 예컨대 ‘비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비포 미드나잇>에서 두 주인공은 6살짜리 쌍둥이 자매도 돌보고 있는 부부인데, 영화 내내 보는 사람의 머리가 아플 정도로 끊임없이 싸워댄다. 부부다운(?) 일이다. 정말 서로에 대한 독기 서린 말도 서슴지 않으면서 싸운다. 보는 관객이 ‘저러다 이혼하는 결말인가보다’ 싶을 즈음, 둘은 난데없이 화해한다. 무슨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화해한다. 단막극에서 이런 전개라면 당장 ‘개연성 없다’, ‘용두사미다’ 같은 비판이 쏟아질 테지만, 이 시리즈는 18년이라는 시간을 축적한 이야기다. (첫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를 극장에서 봤다면) 관객도 그 18년을 함께 살아온 셈이다. 이 이야기의 개연성은 그 시간에서 나온다. 18년을 투닥대며 쌓아온 관계가 단 하루의 말싸움으로 무너질 리 없다.
출처 : <비포 미드나잇>. 모르긴 몰라도 눈 피하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일 것이다.

<보이후드>가 시간의 축적을 활용하는 방식도 재밌다. 12년을 2시간 40분에 담아내야 하니 이야기가 촘촘하진 못하다. 6살, 7살, 8살… 매해 소년의 삶에 큰 변곡점이 찾아올 것처럼 그려지다가, 천연덕스럽게 곧장 1년을 건너뛰는 연출이 반복된다. 소년의 삶은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고, 소년은 착착 성장한 모습이다. 어라?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지? 방금 그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소년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관객은 깨닫는다. 그 묘사되지 못한/않은 이야기들은 소년의 내면에 생생하게 쌓여 있구나, 하고. 역시 이 이야기가 단막극이고 몇몇 시간들을 담아낼 뿐이었다면 이런 이해는 가능하지 않았을 테다. 관객이 목격한 소년의 12년이 이 영화의 개연성을 구축한다.

이런 작업방식은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소설이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영화가 그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면, 게임은 그 세계의 일부가 되게 한다’라고 했던가?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를 예로 들자면, 이 게임에서 조엘의 마지막 선택은 플레이어가 조엘로서의 시간을 쌓지 않았다면 쉬이 공감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일 게다.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는 마치 게임의 그것처럼, 관객이 주인공들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게 하여 그들의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여러 선택들에 대해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 매주 수요일에 한 코너씩 업데이트됩니다. 1) 랜디 서의 사적리뷰: 랜디 서 평론가가 주목해야할 음악을 소개합니다. 2) 희미넴의 bukku bukku: 동아일보 임희윤 기자가 북유럽 음악으로 안내합니다. 3) 강남규의 말줄임표: [지금은 없는 시민]의 강남규 저자가 공동체에 대해 얘기합니다. 4) 차우진의 워드비트: 음악평론가 차우진이 노랫말에 대해 씁니다.
19
팔로워 84
팔로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