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도 1도 될 수 있는
2024/05/08
언젠가부터 ‘반도체’를 이야기하면서 흥분하는 나를 발견한다. 지루함이 지뢰처럼 매복해 있는 전자 회로 이론을 설명할 때, ‘반도체’ 이야기는 마치 회심에 찬 반격처럼 내미는 카드다. 그 옛날 할머니가 나를 주려 장롱에 아껴둔 양갱을 꺼낼 때처럼, 받는 이보다 그것을 꺼내는 이의 설렘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도무지 반도체에 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 반도체 산업1)과 관련된 주식이 있었다면 이 마음이 더 컸으려나? 아쉽게도(?) 그쪽은 내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반도체는 중간을 뜻하는 반(半, semi-)에서 그 정의를 더듬어볼 수 있다. 구리와 같은 금속처럼 전기가 잘 통하는 물질을 도체라 하고, 나무나 고무처럼 전기가 통하지 않는 물질을 부도체2)라 한다. 반도체는 그사이에 놓인, 한마디로 애매한 존재들이다. 어떨 땐 도체였다가 어떨 땐 부도체였다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녀석들이다.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대부분의 학문이란 분류와 구분의 축적이라 생각한다.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이고, 유사한 것들을 한데 묶거나 다른 것들은 분리하는 등 연구를 이루는 기본적인 행위를 단순하게 보자면 그렇다. 전기가 잘 통하는지, 통하지 않는지를 ‘전도성3)’이라 정의하는데 어떤 물질이든 이 성질을 기준으로 도체, 반도체, 부도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문은 좀 더 명확하게 분류되는 것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19세기가 되어서야 반도체에 관한 발견4)이 나타난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물론, 반도체 연구 이전에 전기에 관한 지식의 축적이 필요했다. 반도체는 이미 표현했듯이 종잡을 수 없고 애매한 존재였기에, 실험이 더욱 까다로웠고, 가시적인 발명에 이르기까지는 인류에게 상당한 노력과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반도체가 가진 모호함과 가변성은 상대적으로 확실하게 반응하는 도체에 비해 우선시되지 못하고, 조명받지 못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전기는 그 이름을 얻게 된 그리스 시대5) 이래로 아주 오랜 시간 인...
음악, 퍼포먼스, 설치 등 경계 없는 미디어 창작을 수행하면서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든다.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서울익스프레스'의 구성원이며, 2017년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을 설립하여 기술 문화의 다양성과 접근성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