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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1

[문학 속 한 장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그의 좁은 방은 높다란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롱에 가까운 곳이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상)>, 을유문화사, 9쪽

그는 […] 자신의 비좁은 방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길이가 겨우 여섯 걸음 정도 되는 작은 광 같은 방으로 […] 게다가 어찌나 낮은지, 키가 좀 큰 사람이라면 짓눌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천장에 줄곧 머리를 찧을 것만 같았다.

51쪽

<죄와 벌>은 ‘골방’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주인공이 머무는 천장 낮은 방의 비좁음과 답답함을 작품 내내 반복해서 묘사한다. 이 하숙방은 ‘장롱’과 ‘작은 광’에, 나중에는 ‘관’에 비유된다.

소설 첫 머리에서 주인공은 방을 나와 거리로 나선다. 다음은 소설의 첫 문장이다.

7월 초, 지독히도 무더운 때의 어느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 골목의 셋집에 있는 자신의 조그만 하숙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느릿느릿 K 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9쪽

‘하숙방에서 거리로 나와 다리 쪽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이 소설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떻게 보면 <죄와 벌>은 인물이 골방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전 한 달 동안 주인공은 방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지금 거리를 걷는 그의 머릿속은 골방에서 떠올린 ‘어떤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인공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어떤 일’은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전당포 노파를 죽이겠다는 생각이다. 우둔하고 악독한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아 ‘전 인류를 위한 봉사와 공공사업’에 사용한다면, 하나의 사소한 범죄가 수천의 선행으로 보상되는 격이라는 것, 공공의 가치라는 저울에 달아볼 때 노파의 생명은 벌레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충격적인 발상이지만 이 생각의 바탕에는 라스콜니코프가 오랫동안 생각하고 다듬어온 ‘초인 사상’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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