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년 전, 이 땅에 천운이 내렸다
2024/05/23
479년 전인 1545년 4월 28일, 이순신이 이 땅에 났다. 지금의 인현동 자리인 서울 건천동에서 하급 관료이던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두 차례 왜침에서 조선을 구하고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으로 추앙하는 그의 탄생이었다.
부모를 따라 어려서 충청남도 아산 땅으로 옮겨간 그는 나이 서른둘이 되어 무과에 급제한다. 병과 4등으로, 갑과와 을과엔 들지 못하고 중간보다는 조금 나은 성적이었다. 그해 무과 합격자 33명 중 12위, 병과급제자이니 만큼 하급군관부터 관직을 시작해야 했던 이순신이다.
그의 관직생활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고지식한 성향 탓에 상관의 그릇된 행태를 지적하거나 관행이던 일에 저항하기 일쑤였다. 인사를 담당하는 훈련원 봉사시절엔 병조정랑 서익이 지인을 참군으로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하다가 좌천되었다. 이때 서익이 이순신을 뜰아래 세워두고 힐책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제 뜻을 꺾지 않았다.
이후 발포 만호로 승진해 있을 때는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영내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였다. 이때도 이순신은 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 없다 하며 성박이 보낸 심부름꾼들의 앞을 막아섰다. 성박의 후임으로 온 신임 좌수사 이용도 이 이야기를 듣고 이순신을 해하려 들었으나 주변의 만류로 마침내 이순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우리는 이순신을 어디까지 아는가
이순신의 이 같은 태도는 못난 상급자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듯하다. 앞에 언급한 서익이 훗날 이순신을 음해하여 그는 다시 만호직에서 봉사직으로 강등을 겪는다. 7년 뒤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분전했음에도 상관이던 함경북병사 이일의 왜곡된 장계로 백의종군의 치욕을 당한다. 거듭 상관과의 분란을 겪던 이순신은 왜침이 눈앞에 다가온 1590년 이후가 되어서야 선조의 발탁에 의해 해군 중추로 급속 승진한다. 마침내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