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을 회고함 - 교육민주화운동 관련 해직교사 이야기
2024/05/17
몇 번이나 원고 작성을 거절했었다. 가장 큰 핑계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설마 원고지 20매 쓸 시간도 없었을까. 그것은 순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해직일기를 쓰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부채감이 있었다. 교실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흘렀고, ‘다른 삶’을 통하여 교육을 바꾸고 싶었으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마감을 며칠 앞두고 최종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정년퇴직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남과 달랐던 삶을 스스로 돌이켜 작은 매듭이라도 지어보기로 했다.
나에게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전후한 시기는 크게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전교협과 지교협 활동에 참여했고, 관악동작에서 강서남부 지역의 학교로 전입해 학습모임을 하다가 분회를 결성했다. 이 과정에서 교장과 함께 분회 결성식을 말리던 부장교사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나중에 징계의결 요구서에 줄줄이 도장을 찍었던 분들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함 선생에게 러브레터 썼어"라고 말했던 교장의 말은 징계의결 요구서에 ‘구두 경고’라 적혀 있었다. 이 학교에서 해직을 결심할 때 엄청난 결단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도부의 지침을 충실하게 따랐고, 해직 기간이 4년 6개월이나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온 관내 경찰서 정보과 형사에게 “다 큰 놈이 생각 없이 그러겠느냐. 돌아가라.”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형사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가슴이 떨려서 한참을 진정해야 했다. 반복되는 집회 참여와 경찰서 연행, 유치장 구금은 보통의 해직교사들이 감당해야 할 기본적인 일 중 하나였다. 교육민주화를 위해 고초를 겪었던 선배교사들에 비하면 특별할 것 없는 해직교사들의 일상이었다.
당시 강서남부지회는 서울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활동가들의 결의도 높았다. 모든 투쟁과 사업에서 원칙적이고 강경한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