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말해보자면] '사회주의자'는 '청년정치'라는 허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청년정치'에 관해 논할 때마다 다소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시아적 정체성에 관해 생각하고는 한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등의 19세기 유럽인들이 동양사회의 후진성을 비판하며 '정체성'(停滯性)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때 이러한 주장은 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되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베버 모두 인도인, 중국인 등의 동양인들이 자본주의를 창출해내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자본주의에 '적응'하는데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가령 베버의 유명한 아시아 분석서인 <도교와 유교>에서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신랄한 비평을 하면서도 서구의 자본주의와 접촉한 이래 중국인들의 놀라운 역동성이 자본주의에의 적응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며 대단히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니까, 이들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한편에서는 아시아 사회가 정체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내부에 자본주의에의 적응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동일성'의 재생산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붉은 여왕'처럼 아시아적 사회도 동일한 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역동성을 드러내야 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아시아적 사회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적어도 '청년 정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솔직한 답변이 이닌가 한다.

201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들었던 말이 '청년정치'였다. 2012년 대선패배 직후에 민주진영에서는 '20대 개새끼론''일베', 그리고 '청년정치의 부재'를 한탄하는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막연하게 청년이 진보적이며 진취적일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서는 그때부터 비판적인 의견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청년'들은 계속해서 소환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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