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책 읽기] 원수를 보러 가는 여행: 연행(燕行)과 홍대용의 생각
2022/08/05
By 김영민
연행의 세계
18세기 조선 지식인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에서 말했다. “조선인들은 세상 한구석에서 속 좁은 기풍을 지니고 살아왔다.” 이러한 일견 폐쇄적 분위기에 일조한 것은 당시 조선 사회를 풍미한 조선중화주의다. 조선중화주의란 명나라 쇠망 이래 문명의 핵심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신념을 말한다. 조선중화주의자는 해외에 견문을 넓히러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18세기 조선중화주의자 김종수는 이렇게 말했다. “북경은 오랑캐의 악취와 오물로 암흑천지인데 (……) 만동묘 아래 촌에 거주함만 못하느니.”(『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89쪽)
그렇다고 해서 조선인들이 외국에 가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도 있었고, 표류를 통해 류큐와 마카오 등지에 다녀온 문순득(文順得, 1777-1847)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 밖에도 주기적으로 단체 해외여행을 한 이들이 있었으니, 중국에 파견된 사신단 일행이 바로 그들이다. 공식적인 경우만 따져도 명나라 때 1,252회, 청나라 때 약 500회 정도 사절이 파견되었다.(『조선연행사와 조선통신사』, 15쪽) 사절들은 서울에서 북경까지 이천 리가 넘는 여행길을 몇 달에 걸쳐 다녀왔다.
이 사신단의 공식 일원이 되려면 상류층이어야만 했다. 현직 관료가 아니더라도 집안이 좋으면 사신단에 낄 수 있었다.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명목으로 집안사람들을 대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헌 홍대용도 숙부 덕분에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연암 박지원도 팔촌 형을 따라 중국에 다녀온 뒤 그 유명한 『열하일기』를 지었다.
그렇다고 상류층만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은 아니다. 사신단에는 상류층뿐 아니라 짐을 나르는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다수의 하층민이 동행했다. 이들이 총 몇 명이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전체 여행자 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연행을 통한 조선 후기 청나라 여행 경험자는 연인원 기준 대략 17만 명 이상이었고, 전근대 시기에 이렇게 정기적으로 단체 해외여행을 한 경우는 실로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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