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의 수리대전쟁1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4/08/21


지난 7월 말은 지독했다. 좀 과장하면 노후되어 무너지는 세월과 싸우는 기분이 들 정도로 여러 물건이 망가졌다.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는 다 내가 너무 낡은 물건이나 너무 싼 물건을 써서 일어난 것이지만, 한번에 이렇게 연달아 두드려 맞으니 나 자신 이외의 무언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샘솟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것은 프린터였다. 프린터따위 보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마당에 프린터 하나가 고장났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건 대단히 황당하고 나약한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월말에 나는 프린터로 인쇄해서 실물 원고를 보내야만 하는 공모전의 마감 기한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따라서 프린터가 고장났다는 건 수능 시험장에서 펜이 나오지 않게 된 것과 비슷했다.

인쇄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 사태를 아주 오래도록 여러번 겪었기에 처음에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가정용 프린터와 싸운 경력만 거의 20년에 달하니 이번에도 시간을 들이면 좀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나는 정해진 수순대로 헤드를 청소해보고, 주사기를 이용해 카트리지에 잉크를 강제 공급해서 프린터가 빈 카트리지로 헛손질을 할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했다. 간결하게 쓰긴 했지만, 실제로는 번거로울 뿐더러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카트리지를 뽑아들 때부터 시작해서 주사기에 잉크를 채우는 순간, 주사기 실린더를 눌러 잉크를 주입하는 순간, 카트리지를 다시 꽂아놓는 순간 등 모든 순간에 어디서든 잉크가 새고 튀어 사방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실수로 대량의 잉크가 누출되기라도 하면 멍하니 주저앉고 싶어질 정도로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내 손과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고도 프린터가 정상이 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하고 수리를 미룰 때도 있다. 기약 없는 작업에 기력을 쓰며 주변을 더럽히다 보면 항아리 밑이 빠진 줄도 모르고 물을 붓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상하는 탓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짜증을 내고 앉아있을 수도, 작업을 미룰 수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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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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