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2
신념은, 인간을 생물 종(種)의 지위에서 이성(理性)으로 판단/행동하는 사람으로 격상시키는 주요 인자이긴 할 겁니다. 그러나 홀로는 불완전한 존재로 또한 사람이기에 확고함을 자부한다 해도 가시지 않는, 아니 외려 있어 마땅한 게 다름 아닌 여지(餘地). 왜냐하면 꼭 그 표현처럼 남아[餘] 있으니[有] 들어서는 것도 가능한 만큼. 따라서 저라는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인 이 여지를 인지/인식하는 한해서만 객관 역시 개입 가능하고 이를 적극 수용하기도 하면서 꾀하니 비로소 변화 이루고. 따라서 이것이 전제된 상태라야 겨우 능동적 자세라 이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열린 자세라 입으로 자임한들 그리 되는 게 아니니, 객관이 들어설 여지 자체를 두지 않으려 한다면 아니 마치 애초에 없던 것처럼 여긴다면 그저 표리부동에 불과. 물론 타(他)에 일체 피해 끼치는 바 없이 자기라는 터울, 자신의 경내에서 추구하는 과몰입이라면 뭐 나름의 자유. 딱히 버르집고 따질 일은 아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문제로 불거지겠죠;;
일례로 독불장군의 그릇된 진두지휘를 들 수 있겠는데요. 이로 인한 폐해를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갈음할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죠;; 당장 휘하의 군병은 물론 민중의 생사가 달려 있는데. 어떻게 매양 벌어지게 마련인 일[常事]로 치부하겠어요;; 그러니 바로잡자고,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패전에 그치지 않고 아예 멸족/멸종에 이를 수 있음을 각계각층이 경고하게 마련.
이를 뒤집어 이르면, 도그마에 함몰된 지경에 처한 이들이야말로 속한 사회의 지속가능을 저해하는 요소이자 존속을 위협하는 위험 인자일 수 있다는 것. 매몰 지경에서의 확신은, 자신이 마치 성역에라도 든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도취 상태의 경험을 지속하게끔 하지요. 때문에 비판은 자기 믿음을 흔드는 악마로만 비치고.
하기에 독단을 경고하고 비판할수록 제 결단이 바람직하다는 확신을 강화하죠;; 앞서 이른 바처럼 이로 인한 피해가 전적으로 그 자신에 국한한다면 안타까울 따름이나...
'육면각체'를 쌓아 올리는 '건축'을 '무한'으로 거듭하는, 사각(四角)의 '광장' 사회,
그 속에서 저마다 자기 내면에 정주할 곳을 우선하여 가꾸도록 돕는 말·글.
이를 조력하는 동네서점.
생각[思]에서 깨달음[覺]에 이르는 여정을 돕는 책 그리고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간,
사각공간(思覺空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