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94편 - 모든 인류에 대한 형제애의 이념을 갖춘 알바니아 벡타쉬파, 다종교적 요소를 갖춤으로써 민족, 종교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15
근대 시기 알바니아에서는 세 가지 주장이 등장했다. 첫째는 유럽중심주의적인 부분으로 유럽과 하나가 되기 위해 카톨릭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당시 정교회는 유럽의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입지가 허약하다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칸데르베이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된다. 둘째는 여러 종교적 경향을 정치와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셋째는 이슬람교를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이른바 알바니아-이슬람주의로서, 이는 반(反) 유럽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슬라브주의 및 그리스 정교회를 모두 배격하는 주장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위에 적시한 세 가지 입장 중 가장 적게 나타나고 있다.
사진 : 알바니아 벡타시파 장로들 모습, 출처 : Sara Kuehn, https://www.sarakuehn.com/the-albanian-speaking-bektashi-order-of-dervishes

그런데 알바니아가 처한 이런 이념 간, 혹은 현실 정치적 입장과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부분을 무저항주의 정파인 벡타시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벡타시파는 무슬림의 한 분파로 간주되고 있으며 기원은 13세기 하지 벡타시 벨리(Haji Bektash Veli)에 의해 창설되었고, 오스만투르크가 발칸을 정복하자 발칸 반도에도 따라 들어왔다. 이러한 벡타시파가 알바니아에 들어와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17세기 중엽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당시 수니파는 정통 이슬람 및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권력, 아랍어 등과 연관성이 큰 된 반면, 벡타시파는 지역적 특색을 가진 문화, 지역 고유의 언어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통해 연관되어 진다. 19세기 알바니아 민족 혹은 지역주의에 주역을 담당한 인물은 벡타시파였던 알리 파사(Ali Pasa)였다. 

20세기 초, 벡타시파는 전체 알바니아인 가운데 약 15%, 전체 무슬림인 약 60% 가운데는 약 1/4 정도였다. 이러한 벡타시파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동향의 중심이 되었고, 오스만투르크의 치하에서 불법적으로 알바니아 언어를 가르치는 교육의 중심이었던 정파인 것이다. 1922년 스크라파르(Skrapar)의 프리슈타(Prishta)에서 있었던 첫 번째 알바니아 민족 회합에서 알바니아 벡타시파는 터키 벡타시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1925년 터키에서 벡타시파를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한 다음에는 세계 벡타시파의 회합이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열리면서 터키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벡타시파의 특징은 자유의 이념을 극대화하였고 기존의 수니파보다 더 세속적이었다. 

벡타시파 무슬림들은 음주를 할 수 있었고, 벡타시 자미에서 술을 직접 생산하기도 했다. 이들의 교리는 남녀 평등을 추구하며 다른 이교적 종교 요소, 특히 정교회가 갖고 있는 교리의 요소들을 적극 수용했다. 기본적으로 벡타시파는 여러 종교의 교리들을 융합한 만신(萬神)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그리스 정교회의 전통이 강한 흑해 연안의 무슬림 벡타시파 일부는 사실상 은밀한 기독교인들(Cryptochristianoi)들로 간주되어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이들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불이익을 피하기 우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벡타시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는 실상과 다르다. 오히려 수니파의 보수적인 교리들에 대한 저항 심리의 발로 보는 편이 더 강하다.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이끌었던 선구자 중 하나인 나심 프라셰리(Nasim Prisheri)는 벡타시파에 대해 신앙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적인 부분과 여러 종교들의 교리들을 받아들인 결과로 인해 여러 종교들의 복합적인 요소가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벡타시파에 보이는 <꾸란>과 <성경>의 복합적 요소는 알바니아 내 종교적 차이를 봉합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벡타시주의(Bektashnism)는 일정 종교 혹은 민족 집단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한 형제애를 근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자유와 각종 종교들의 융합적인 성격을 지닌 벡타시파는 상이한 종교적 갈등은 물론 상이한 민족적인 갈등까지도 봉합할 수 있는 이념적 장치를 지닌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알바니아에는 이슬람, 카톨릭, 정교회 등 세 가지 종교가 공존했지만 다른 나라나 지역과 달리 이들 세 종교 간 분쟁의 역사는 많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종교적인 믿음이 민족의식의 형성을 방해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종교는 정복자들인 오스만투르크가 지배적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요하고 이를 통해 민족 분할적인 통치 이념으로서 작용한 부분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알바니아 벡타시파의 존재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혹은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이고 있는 것에서 종교나 민족주의로 포장한 집단 이기주의의 산물인 경우가 적지 않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인 이기심에 따른 분쟁에 대해 또 다른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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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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