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 무죄!”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7/12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 무죄!”

드레퓌스 대위

1894년 프랑스 정보 요원이 누군가가 독일 무관에게 보내는 기밀 문서를 훔쳐 내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스파이를 찾은 끝에 범인을 잡아냈는데 근거는 그 필체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체 말고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빌어먹을 유태인이었다. 간첩과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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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 본부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다."면서 보다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하는 이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나아가 "이것은 너무나 민감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일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협박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자신이 무죄임을 열심히 항변했지만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훗날 ‘빠삐용’의 무대가 되는 악명 높은 기아나의 유형지로 끌려간다. 그 이후 드레퓌스의 생이 그려내는 드라마의 주요 배역들을 읊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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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튜 피카르

조르쥬 피카르 중령. 그는 스파이 사건을 조사 중 어처구니없는 진실을 접하게 된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고 문제의 필체가 또 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 그는 용감하게 에스테라지 체포와 드레퓌스의 재심을 상관에게 요구하지만 완전무결하게 거부당하고 튀니지로 좌천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외부에 전파함으로써 프랑스의 양심을 지킨다. 이 사실은 변호사를 거쳐 상원 의원에게까지 흘러들어가지만 그들은 이 사건을 폭로할 용기가 없었다. 반유태주의 물결이 거센 상황에서 드레퓌스 편을 드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자살 행위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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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의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드레퓌스 구명에 나선다. 그 부인은 남편이 법정에 출된 증거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또 다시 드레퓌스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초지일관 프랑스 군부 편을 들던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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