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이 ‘굴욕’일 수 있다고?

나다운 · 게으른 활동가
2021/11/23
내 안에서 생겨나, 내 몸을 찢고 나와, 내 삶 밖으로 떠나갈 타자와의 만남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은 내 몸과 삶, 타자와 세계에 내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음을 실감하는 체험이었다. 피임에도 불구하고 임신하였으니 예기치 않은 시작이었고, 태아의 성별과 이목구비, 장애나 질병 여부, 심지어 탄생의 여부조차 이전의 나로서는 낯설기 짝이 없는 기도와 감사의 영역이었다. 

입덧은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호르몬의 영향이라는 심신의 변화는 드라마틱했다. 산모의 진통이 얼마나 오래고 고되건 자궁문이 열리고 아이가 산도로 내려와야 자연분만이 가능했으므로, 분만 중의 나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힘쓸 뿐이었다. 아이의 성격과 행동, 크고 작은 병치레와 사건 사고도 나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라 기도와 감사의 영역은 커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은 먹고 입고 자고 노는 수준에서 호불호를 표현할 뿐인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때가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다. 나의 늙음과 죽음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성장과 분리는 나의 뜻과 무관한 필연이며,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임신-출산과 맞먹는 정도로 나의 한계를 강렬하게 인식한 개인적 경험으로는 질병과 교통사고 정도를 꼽겠다. 쓰고 보니 모두 신체의 손상 또는 기능의 부전으로 자유로운 운동이 제한되고, 무엇보다 심각한 통증으로 사건 이전과 같은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의료적 개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의료적 개입을 통해 통증이 완화되고, 기능이 회복되었으며, 완전하지는 않아도 사건 이전의 수준으로 일상을 건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그래서이겠지만, 나는 현대 의학의 개입을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의료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임신과 출산 경험을 긍정적으로 회고한다.
   
임신 초기 2차례 가벼운 출혈로 태반박리가 의심될 때 안정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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