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왜, 이덕일 소장의 주장은 무엇인가?
2023/08/07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최근 <전라도 천년사> 토론회(23년 5월 26일, 광주MBC)에서 일찍이 전라도 지역을 왜가 지배했다고 한 자신의 주장이 지적 당하자, 발끈하면서 그것은 "왜라는 세력은 사료를 보면 양자강 유역에 있다가 발해 연안을 거쳐서 한반도 남부를 거쳐서 일본열도로 갑니다"(24분경)라고 반발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주장했던 것일까? 그의 주장을 실제로 살펴보자. 그가 처음 이런 주장을 한 것은 1999년에 낸 책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였다.
그는 정말 그렇게 주장했던 것일까? 그의 주장을 실제로 살펴보자. 그가 처음 이런 주장을 한 것은 1999년에 낸 책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였다.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정치세력인 것이다. 당시 왜가 강력한 정치집단이었음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2쪽)
그가 급한 마음에 둘러댄 변명이 과연 이 책에 있을까?
일본 천황가가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온 기마민족이었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여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진 강상파부(江上波夫, 에가미 나미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마민족이 4세기초 바다를 건너 북규슈(北九州)에 한·왜 연합왕국을 수립"했다가 "4세기 말경에는 동북 기나이(畿內) 지방에 대화(大和, 야마토) 정권을 수립하는데, 그 주인공인 16대 오우진(應神) 천황은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는 4세기말에 일본열도 내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부정되지만,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했던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발상을 전환한다면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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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아, 설성경 교수의 발표문이었군요. 해당 논문은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wokyung826 감사합니다. 강봉룡 교수의 논문을 살펴보니 아마 그 발표 현장에 계셨던 모양입니다.
강봉룡 교수님 논문은 이거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성격론-그간의 논의를 중심으로->(지방사와지방문화 3권1호)
그 내용을 보면
①영산강유역(특히 나주 반남면) 옹관고분을 염두에 둘 때, 영산강유역에는 경기·충청도 일대의 마한연맹체와는 별개의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그것이 바로 倭 혹은 倭韓이다. ②삼국지 위서 한전에 ‘韓은 …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南與倭接) … (변진)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있다(與倭接南)라 되어 있는데 ’接'이라는 표현은 육지로 경계률 삼을 때 쓰는 표현이므로, 왜는 마한과 변진(변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야한다. ③광개토왕비문에서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倭가 바로 한반도 남쪽에 있던 왜이다. 이 왜는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와 접전을 할 정도로 강성했다. ④ 한반도 남부의 왜는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광개토왕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그래서 5세기 이후의 중국 사서에서는 왜의 중심지를 일본열도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⑤일본열도로 건너간 왜는 과거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하여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하였는데, ‘송사’에 나오는 왜 5왕의 '도독 … 제군사' 의 작호 제수 요청기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⑥ 임나일본부란 야마토정부의 한반도 남부지배기관이 아니라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한의 고토회복운동의 전초기지였다. (이덕일,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고분에 주목하여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의 존재를 상정하고, 관계 문현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서 이를 倭 혹은 倭韓으로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헌 자료의 해석에 많은 무리가 따른다. 예를 들어 ‘接’의 표현을 쓴 것은 당시 바다와 섬들을 통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들 때, 반드시 육지로 경계를 삼는 경우에만 쓰는 표현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5와 6의 주장은 신판 기마민족설을 연상시키는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옹관고분에 주목하여 영산강유역에 독자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주장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왜 혹은 왜한으로 비정한 것은 모한으로 비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삼한 살펴보니 알려주신 설성경 교수의 해당 논문은 98년 5월 29일 287회 국학연구발표회에서 한 발표문인 모양입니다. 대개 발표문을 나중에 논문으로 다시 내니까 논문은 아래 것이 맞을 것 같네요. 시기 상으로 차이도 없고요. (아시겠지만 논문은 심사 과정이 있어서 게재 되기 수 개월 전에 제출하게 마련이죠.)
@삼한 강봉룡 교수의 해당 논문을 본 적이 없네요. 그런데 연대 설성경 교수(국문과)가 문제에 대해서 논한 논문은 찾았습니다. 말씀하신 제목은 못 찾았는데, 동방학지에 실린 "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모색"(1998.6)이라는 논문에 그런 내용이 있네요. 일단 살짝 훑어만 봤는데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강봉룡 선생도 언급했던 바대로 이덕일의 전라도 왜 주장은 설성경이라는 분의 「한·일 국학 갈등의 원천을 해체한다 - 한반도 내의 ‘倭’의 존재 가능성을 중심으로」(1998)라는 논문이 원 출처일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이 논문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삼한 자기 맘에 들면 뭐든 하는 거죠. 학자가 아닙니다. ㅎㅎ
@wokyung826 "접" 문제는 사실 "지엽말단적"(이 소장 좋아하는 소리죠)인 문제로 보아 쓰지 않았습니다. (먼산)
1999년에 주장한 내용이 참 재미있군요. 에가미 설을 인용하면서 이게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일로 보면 안 되고 한반도 남부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며 제 입맛대로 남의 학설을 고치고 있는데, 이럴 거면 왜 인용을 하는지 의문입니다.
저기에 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사료의 해석 문제도 있습니다.
'접' 이라는 한자에 대해서, '이건 육지가 연달아 접해야한다!'라고만 생각하고, '바다로 띄어져 있는 건 접이 아니다.' 라고만 보더라고요
이거에 대해서 강봉룡 교수님이 2000년 논문에서 지적하셨지만(내용은 27일 토론회 정리본에 있습니다.)... 여전히 '접'은 육지로 연결되어야 해! 라고 주장하더군요.
저기에 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사료의 해석 문제도 있습니다.
'접' 이라는 한자에 대해서, '이건 육지가 연달아 접해야한다!'라고만 생각하고, '바다로 띄어져 있는 건 접이 아니다.' 라고만 보더라고요
이거에 대해서 강봉룡 교수님이 2000년 논문에서 지적하셨지만(내용은 27일 토론회 정리본에 있습니다.)... 여전히 '접'은 육지로 연결되어야 해! 라고 주장하더군요.
@이문영 아, 설성경 교수의 발표문이었군요. 해당 논문은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봉룡 교수님 논문은 이거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성격론-그간의 논의를 중심으로->(지방사와지방문화 3권1호)
그 내용을 보면
①영산강유역(특히 나주 반남면) 옹관고분을 염두에 둘 때, 영산강유역에는 경기·충청도 일대의 마한연맹체와는 별개의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그것이 바로 倭 혹은 倭韓이다. ②삼국지 위서 한전에 ‘韓은 …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南與倭接) … (변진)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있다(與倭接南)라 되어 있는데 ’接'이라는 표현은 육지로 경계률 삼을 때 쓰는 표현이므로, 왜는 마한과 변진(변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야한다. ③광개토왕비문에서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倭가 바로 한반도 남쪽에 있던 왜이다. 이 왜는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와 접전을 할 정도로 강성했다. ④ 한반도 남부의 왜는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광개토왕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그래서 5세기 이후의 중국 사서에서는 왜의 중심지를 일본열도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⑤일본열도로 건너간 왜는 과거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하여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하였는데, ‘송사’에 나오는 왜 5왕의 '도독 … 제군사' 의 작호 제수 요청기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⑥ 임나일본부란 야마토정부의 한반도 남부지배기관이 아니라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한의 고토회복운동의 전초기지였다. (이덕일,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고분에 주목하여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의 존재를 상정하고, 관계 문현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서 이를 倭 혹은 倭韓으로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헌 자료의 해석에 많은 무리가 따른다. 예를 들어 ‘接’의 표현을 쓴 것은 당시 바다와 섬들을 통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들 때, 반드시 육지로 경계를 삼는 경우에만 쓰는 표현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5와 6의 주장은 신판 기마민족설을 연상시키는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옹관고분에 주목하여 영산강유역에 독자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주장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왜 혹은 왜한으로 비정한 것은 모한으로 비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강봉룡 선생도 언급했던 바대로 이덕일의 전라도 왜 주장은 설성경이라는 분의 「한·일 국학 갈등의 원천을 해체한다 - 한반도 내의 ‘倭’의 존재 가능성을 중심으로」(1998)라는 논문이 원 출처일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이 논문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삼한 자기 맘에 들면 뭐든 하는 거죠. 학자가 아닙니다. ㅎㅎ
1999년에 주장한 내용이 참 재미있군요. 에가미 설을 인용하면서 이게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일로 보면 안 되고 한반도 남부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며 제 입맛대로 남의 학설을 고치고 있는데, 이럴 거면 왜 인용을 하는지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