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에게 겨울이 왔을까
2023/12/12
모두가 ‘한국 영화의 위기’를 말하는 와중에 보란 듯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있습니다. 44년 전 오늘, 전두환이 집권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관람 중 최대 심박수를 체크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인증하는 ‘서울의 봄’ 챌린지가 유행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운데요.
우리가 ‘서울의 봄’을 보고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이후 전두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90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를 왜곡하며 책임을 회피하기만 했죠.
‘서울의 봄’의 엔딩은 12.12 군사반란의 결과와 그 주동자들의 성공을 전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해서 달려갔습니다. 전두환의 시대가 저물고, 김영삼 정부는 시대의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수술대에 섰습니다. 수술 결과는 무기징역 선고, 그리고 사면이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오늘날 극장가에 넘실대는 분노가 그 후유증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근본적 정치 탐구>에서는 ‘서울의 봄’ 이후, 제5공화국 청산 과정과 그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민주화에서 특별사면까지
노태우 정권
1987년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군사정권이 실제로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5년이 더 걸렸습니다.
6월 항쟁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6.29 특별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습니다. 민주화 세력 내에선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의 반성 없는 민주화 선언을 받아들여야 할 지를 두고 논쟁이 일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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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구속이 되었던 것은 정치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죄없는 폄범한 사람들을 살해한 학살자에 대한 법의 심판이었고,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법의 애도일텐데. 용서라는 이름으로 단 한 사람의 결정으로 사면을 한 것은. 결국 살인자가 피해자들을 비웃듯 잘살게 해준 꼴이 되었으니. 누가 무엇을 화해한다는 논리였을까요? 피해유족들이 전두환을 용서했나요? 대통령의 사면권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아닐런지.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대통령 개인 한 사람어 주관적 판단으로 중죄인이 풀려나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