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음란서생을 보면, 사랑의 여러 자세와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가를 야설작가인 한석규와 화가 이범수가 논쟁하는 장면이 있다.
시집을 읽다가. 나는 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논의는 결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험, 전복이라고 하는 건 기상천외한, 인간이 연출 가능한 기예에 가까운 자세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실은 그런 것들은 실전에 대입되기 어려운 환상에 가까운 어느 경지라고 봐야겠지만. 또 시는 시단에서는, 놀라운 기예를 높게 치는 것 같지만. 마치 패션쇼 무대 위 모델의 비현실적인 비율과 그들이 걸친 실생활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괴상하지만 어쩐지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의상들처럼.
시가 표현 방식, 그 형식으로서만 존재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어떤 기교도 내용에 우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리키는 손가락이냐 달이냐 하는 논쟁. 그 논쟁이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시는 그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는 것이다. 그보다, 신식의 것. 늘 전에 없던 기교에 중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