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범죄 피해자임과 동시에 선생님입니다

가넷
가넷 인증된 계정 · 전 고등학교 교사, 현 프리랜서✒️
2023/08/17
“성희롱 및 교권 침해를 당한 선생님들이 있는지 전수조사를 요청합니다. 현재 개인적으로 파악한 성희롱 피해 여교사만 4명입니다. 학년부에도 협조를 구해서 해당 사안이 발생한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자수를 하고 마땅한 처분을 받게끔 해야 합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교감과 면담을 할 작정이었다. 면담을 신청하기 위해 내선 전화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전화가 먼저 울렸다. 교감 선생님이었다.

관리자와의 면담을 위해 교원평가 화면을 출력한 종이를 들고 교무센터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헛되고 당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우리를 도와줄 거라는, 마땅히 그럴 것이라는 믿음. 직장에서, 시스템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우리의 관리자가, 우리가 소속된 기관에서, 시스템을 만들고 실행을 지시한 상부 기관에서, 우리가 충격과 모멸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는 가련한 믿음이 있었다.

교감을 마주했다. 내가 메시지를 보낸 직후 주요부서 부장 교사들과 관리자가 모여 ‘긴급회의’를 했다고, 회의 결과는 ‘교내 공론화는 할 수 없다’고 결정되었다고 교감은 통보했다. 교감은 ‘선생님들의 2차 피해’나 ‘학생들의 동요’ 등이 발생할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학교의 입장이라고 했다.

피해 교원들 당사자가 원한다면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다만 교권 침해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즉각 분리 조치를 위해 피해 교원들에게 5일의 특별휴가 또는 병가를 부여하는 식의, 가해자가 계도되거나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만 도망치듯 근무지에서 벗어나야 하는 반쪽짜리 교권보호위원회가 될 것이었다.

익명으로 작성된 성희롱을 누가 썼는지는 학교도 교육청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학생들 개인마다 별도의 고유 코드를 발급해 부여하고 시스템 내에서 진행하는 교원평가인데, 학교에서도 교육청에서도 작성자를 추적할 수 없다고? 아무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범죄성 발언을 작성해도 작성자가 누군지 아무도 찾을 수 없다니, 교사들을 사지에 던져놓고 사건이 발생하면 누구도 나서서 책임지거나 보호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런 줄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밀려오는 무력감과 회의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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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고등학교 교사(~2023. 8.) 교원평가 성희롱 사건을 공론화(2022.12.) 했습니다. 악성민원을 빌미로 한 교육청 감사실의 2차 가해(2023.4.)로 인해 사직원을 제출했습니다.(2023.9.1.~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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