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사냥꾼'이 된 빨갱이의 사위 -특무대장 김창룡의 일생
2024/01/31
1956년 1월 30일 원효로 1가. 지프차 한 대가 옥인동 육군 특무부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별 두 개를 어깨에 매단 작달막한 장군이 앉아 있었다. 별안간 운전병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좁디 좁은 길에서 차 한 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운전병은 차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한 치라도 주저하다간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
지금 운전병이 모시고 있는 이는 별 넷 짜리가 떼를 지어 오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군부 내의 실세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었다. 운전병이 득달같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근처에 숨어 있던 괴한들이 차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있던 김창룡에게 가차없이 권총을 쏘았다. 나이 서른 여섯 (실제 나이 마흔)의 특무대장은 아이쿠 소리를 내며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치명상이었다. 급히 인근의 적십자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김창룡 소장은 절명해 있었다.
.
김창룡이라는 사람을 어찌 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1916년 함경도 영흥군 요덕면, 요즘 이름으로 하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로 유명한 두메산골 요덕군에서 태어나 격동의 현대사 한 자락을 살아냈던 이 풍운아의 일생을 잠깐 돌이켜 보기로 한다.
.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보면 양치성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구걸을 일삼다가 동냥을 베풀어 주는 일본인들로부터 일본어를 조금씩 익히게 되고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일본 제국의 충량한 도구가 되고, 조선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일본에 대한 충성과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이들에 대한 적의로 풀었던 일본군 밀정. 이 사람의 인생 경로는 김창룡의 인생 경로와 매우 유사했다.
,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영흥잠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 측량 기사 노릇도 했다고 하고, 일본의 제사(製絲) 회사에도 취직해서 인정받았다고 하니 김창룡 역시 양치성처럼 부지런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 아버지는 김창룡이 농사꾼이 되길 바...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0. 이성가(이정일)는 실리 보고서(백범 김구가 이승만 정부 전복한다는 기밀문서)에 나오는 제4연대장입니다.
아마도 김창룡에게 불리한 약점이 잡힌게 아닐까요?
1. 건국초기에는 혼란을 막고 안정을 막기위하여 권위주의 정치를 합니다.
민주주의 할려면 경제가 우선 발전해야합니다.
2.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32400209105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3-24&officeId=00020&pageNo=5&printNo=22464&publishType=00010
좌익세력이 군 내부에 있었던건 백선엽 회고에 나옵니다.
별개로 최남근은 숙군 당시 총살당할때 애국가를 불렀던 사람으로 1948년 8연대장 재직시 일본계 미군 정보요원의 감시를 받았다합니다.
죽을때 이승만 만세 부르고 애국가 불렀다고 그게 "좌익 아니다"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린드버그 유괴사건 범인도 자기는 죽을때까지 무죄라고 했습니다.
3. 이승만이 김구가 죽었을때 문상가지 않았던 이유는 백범 김구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답니다.
안두희는 김구가 군대에 심어놓은 한국독립당 비밀당원이었는데 백범 김구와 10분이상 말다툼끝에 죽였다고 합니다.
당시 수사기록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070200329202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7-02&officeId=00032&pageNo=2&printNo=860&publishType=00020
당시 선우진은 1949년 안두희 공판 당시 안두희를 2층의 김구에게 안내하고 지하실에서 밥을 먹다가
김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식으로 진술했는데(공판기에도 나옵니다)
재판장 원용덕이 선우 비서는 무슨 밥을 2~3분간 빨리 먹느냐는 질문에
선우진은 훗날 안두희를 2층의 김구에게 안내하고 지하실에서 점심밥인 만두국이 나오기전에 김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식
(점심밥이 나오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진술을 바꾸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냐하면 당시는 건국 초기 혼란기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