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은 질기고 무에선 달큼한 맛이 난다

도시의 계절
도시의 계절 · 도시의 절기에 관한 에세이
2022/06/16
예슬의 경칩,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다.

 장을 보고 왔다. 찰고추장, 유부초밥, 냉동만두, 팽이버섯, 라면, 휴지. 영수증에 구매한 상품들의 목록이 가지런히 순서대로 나열돼 있다. 백수가 된 후로는 어쩐지 영수증을 잘 버리지 못한다. 장을 보고 난 후로도 몇 주 동안 보면서, 어디에서 사는 것이 더 저렴한지 다음에도 이 물건을 살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렇게 된 이유는 줄어가는 통장 잔고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둔 직후엔 밥 차려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귀찮아서 자주 굶었다. 잠에 젖은 몸을 일으켜 싱크대로 옮겨놓는 일, 어젯밤 쌓아둔 설거지를 처리하고 새로운 식기와 냄비 혹은 프라이팬을 꺼내는 일, 냉장고를 채워줄 식재료를 사 오는 일, 모든 게 벅찼다. 간혹 약속이 잡혀 외출 후 집에 돌아올 때나, '이렇게 누워만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목적지도 없이 밖으로 나선 날에야 겨우겨우 시장을 봤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과중한 과업도 없는 잔잔한 백수의 나날이었지만, 매일 침대와 소파만 오가는 생활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나를 바꿔줄 '어떤 계기'를 찾아 헤맸다.   

 삶에 무언가 빠졌다고 느낄 때면 여행을 떠났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선 무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도시와 일터로 돌아오면 그 무언가는 모레 알이 손 틈을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지만 상관없었다. 도망칠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도망치듯 떠난 여행지는 늘 그렇듯 새로운 습도와 온도로 여행자를 반겨주었다. 나는 매번 더 먼 곳, 더 새로운 곳을 찾았다. 이번에도 삶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무기력한 생활에 새로운 계기를 찾기 위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즐겁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걸으며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내게 사는 것은 대체로 고통이었다. 살면서 겪은 수많은 사건은 곧 휘발됐기에 더는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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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잃은 도시에서 계절을 찾는 여자 넷 무해, 진리, 예슬, 밤바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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