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15편 - 멕시코 혁명으로 집권한 프란시스코 마데로 정권
2024/04/20
1911년 5월 21일 시우다드후아레스 조약(Treaty of Ciudad Juárez)이 체결되면서 5월 25일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는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했다. 디아스가 퇴진한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Francisco León de la Barra, 1863~1939)가 5개월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이전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1873~1913)는 미국에 망명해 있었는데 그는 산루이스포토(San Luisepoto)시 계획을 발표하며 혁명을 호소했고, 멕시코에 남아 있는 반 디아스 진영은 디아스의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궐기하면서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5개월 후, 열린 선거에서 마데로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된다. 마데로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지지자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통령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 사실 이는 혁명 시작 당시부터 보였던 조짐이었고 매우 다양한 세력들이 마데로의 하부 조직으로 모이다 보니 생긴 결과이기도 했다. 더불어 20세기 초 멕시코는 디아스 당시 막 공업화가 시작된 농업 국가였고 인구 대부분이 아시엔다(Hacienda, 대농장)에 묶인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 판초 비야(Pancho Villa, 1878~1923) 와 같은 아나키스트들 및 소작농 출신 혁명가와 농민들은 토지개혁 추진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던 마데로는 토지 개혁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마데로는 농민들의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그의 기반은 매우 불안정했다. 디아스 체제의 지지 기반인 군부, 대농장주, 교회, 기업가 등은 마데로를 찬탈자로 여겨 마찬가지로 불만을 품었고, 전국에서 저마다 여러 이유로 마데로에게 반기를 드는 군벌들로 인해 멕시코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마데로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혁명 정부의 설립을 열망하는 혁명 세력들의 다양한 요구를 무시했다. 게다가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사임에 따라 대통령 직위를 승계한 데 라 바라의 임시정부를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군을 인정하고 우군이었던 혁명군의 해산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은 곧 디아스 정권의 관료와 군부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정치 권력의 교체를 혁명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던 마데로는 철저히 이상주의자였다. 그러한 그의 정책은 겉으로는 개혁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한계에 부딪쳤던 것이다.
디아스의 관료와 군대를 인정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순점은 혁명 정부 내에서 마데로의 입지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다. 혁명 진영 내부에서 구 체제 인사들을 우대하고 혁명군을 소외시키는 마데로의 처사에 대해 각 곳에서 불만이 분출되었고 마데로가 추진한 결속력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비록 디아스는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지배 연합은 여전히 정계, 관료,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카우디요(Caudillo), 대농장주, 관료, 군부, 교회 등 수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준 마데로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마두로를 비판하면서 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데로는 혁명 당시, 농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본질적으로는 대지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멕시코에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 국가의 외형을 만드는 것에만 열심이었다. 그러나 내형적인 차원에서 빈부격차의 해소와 토지개혁 등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 개선에는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만한 개혁을 하려면 마데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하는데 그는 기득권을 내려 놓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했다.
그러나 당시 혁명에 참가한 농민들은 식량과 자신들에게 보장될 농지를 위해 싸운 것이었다. 그리고 마데로는 멕시코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노조 설립도 허용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망명 시절에 현지에서 직접 보고 겪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를 통해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오히려 그를 지원했던 해외 재벌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멕시코의 지방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를 비롯한 농민층들이 토지 개혁을 요구했으나 마데로는 농지 개혁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사실 마데로 및 여러 혁명 지도자들이 대지주 출신이자 대부분 디아스 정권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기득권자들이었디 때문이다. 그러자 혁명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서서히 마데로의 정책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디아스의 지지층인 보수파도 마데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정치 경력이 짧은 마데로가 노련한 디아스와 같은 정치적인 수완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최초로 마데로와 결별한 자는 모렐로스 주에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였다.
사파타는 1911년 11월 25일 '강탈당한 토지, 삼림, 수리 등의 재산은 정당한 권리를 가진 마을 및 국민들이 바로 소유해야 한다(Los bienes robados, como tierras, bosques y agua, deben ser propiedad directa de pueblos y ciudadanos con derechos legítimos)'는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을 발표하면서 마데로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사파타는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을 통해 마데로가 혁명의 적들과 야합하여 디아스 독재를 능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고 비난했다. 사실상 사파타는 마데로가 디아스와 별 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디아스 시대에 수탈된 토지를 즉각 몰수하여 촌락 공동체로 환원할 것과 혁명 반대 세력의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선언하면서 마데로에게 이같은 결정을 요구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와 보상, 자율적인 자치제, 지역적 전통에 따라 공유지 혹은 소규모 사유지를 수여하는 것과 더불어 농업 은행의 설립 등 19세기 후반부터 농민들이 요구해 온 사항들을 모두 망라하였으나 역대 타 '계획'들과 다르게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고 이를 앞으로의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파타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한계였다.
사파타의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이 발표되자 토지 분배 공약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여러 촌락의 지도자들이 사파타 진영에 합류하면서 1911년 말부터 모렐로스와 푸에블라의 요충지들을 통제하였고 이들은 "사파타의 농촌 개혁 운동"을 확산시켰다. 그러자 마데로 정권은 이를 정부에 반기로 규정하고 연방군을 출동시켜 무자비한 소탕 작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한편 유화책을 구사해 사파타 세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이어 터지는 호세 레예스(José Reyes), 호세 오로스코(José Orozco), 바스케스 고메스(Vázquez Gómez) 등등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사파타 운동을 진압하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어려웠고, 농민들은 마데로 정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급기야 의회에서도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마데로는 농장주들에게 자발적인 토지 분배를 호소하기에 이르렀으나 농장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데로 정부는 전체적으로 어떠한 정책이든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잃은 셈이 되었으며 이와 같은 마데로 정권의 무능에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점차 확대되었다.
멕시코 북부 지방에서는 마데로로부터 기대에 못미친 보상을 받은 호세 오로스코(José Orozco)가 마데로를 적대하기 시작했으며 1912년 4월 3일 마데로가 노동 조건 개혁에 반대하자 이를 계기로 '콜로라도스'(Colorados, 붉은 깃발군)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마데로는 독재자 디아스의 휘하에 있었던 군대인 연방군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 장군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 1850~1916)를 보냈고 판초 비야도 여기에 종군했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우에르타는 비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비야를 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을 선고했지만 비야는 처형 직전 겨우 미국으로 탈출했다. 게다가 디아스 휘하의 장군이었던 베르나르도 도로테오 레예스 오가손(Bernardo Doroteo Reyes Ogazón)과 디아스의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 프리에토(Félix Díaz Prieto)가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레예스와 디아스는 군부의 명예가 마데로에 의해 실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군부와 구 체제 세력들에게 궐기에 동참할 것을 선동하였지만 그들의 반란은 베라크루스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초기에 마데로에 우호적이었고 멕시코 혁명을 지지하며 그에게 많은 지원을 했던 미국마저 마데로 정권의 정치, 경제적 불안정함과 치안 유지 능력 부재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멕시코 내의 자국 자본을 보호할 강력한 정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미국의 마데로에 대한 빠른 손절의 중심에는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윌슨(Henry Lane Wilson)이 있었다. 헨리 윌슨은 마데로의 정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우에르타를 비롯한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면서 마데로 정권의 전복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헨리 윌슨의 멕시코 내정에 대한 주제 넘는 개입은 멕시코 내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후일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등의 갖은 횡포를 부렸다. 더불아 마데로 정권은 반란 진압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방대한 규모의 국채를 발행함으로 인해 정부의 재정 압박을 가중시키게 된다. 마데로 정권은 내, 외부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었지만 마데로는 여전히 낙관적인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군부를 중심으로 한 반혁명 세력은 마데로 정권을 전복시킬 음모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이미 1913년 초부터 연방군 장성들의 쿠데타 설은 아예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으며, 마데로의 측근들조차 쿠데타의 가능성을 마데로에게 경고하고 나섰지만 마데로는 쿠데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애써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13년 2월 9일 몬드라곤 소총을 개발했던 마누엘 몬드라곤(Manuel Mondragón) 장군의 주도 하에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쿠데타는 19일까지 이어졌으며 우에르타 장군은 마데로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쿠데타에 대한 진압에 나섰지만 실제로는 진압하는 척,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부대에게는 반란군을 향하여 무모한 돌격 명령을 내려 군사력을 소진시켰다. 우에르타는 당시 미국 대사관의 중개로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월 18일, 우에르타 장군은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 대통령과 호세 마리아 피노 수아레스(José María Pino Suárez) 부통령을 체포한 후 투옥했고, 사형을 면하는 댓가로 대통령직을 하야를 강요했다. 마데로는 이를 수락했지만 대통령이 된 우에르타는 후일 이 약속을 어기고 2월 22일에 마데로 형제와 수아레스를 살해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멕시코 혁명 역사상 비극의 열흘(La Decena Trágica)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던 마데로는 토지 개혁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마데로는 농민들의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그의 기반은 매우 불안정했다. 디아스 체제의 지지 기반인 군부, 대농장주, 교회, 기업가 등은 마데로를 찬탈자로 여겨 마찬가지로 불만을 품었고, 전국에서 저마다 여러 이유로 마데로에게 반기를 드는 군벌들로 인해 멕시코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마데로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혁명 정부의 설립을 열망하는 혁명 세력들의 다양한 요구를 무시했다. 게다가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사임에 따라 대통령 직위를 승계한 데 라 바라의 임시정부를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군을 인정하고 우군이었던 혁명군의 해산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은 곧 디아스 정권의 관료와 군부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정치 권력의 교체를 혁명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던 마데로는 철저히 이상주의자였다. 그러한 그의 정책은 겉으로는 개혁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한계에 부딪쳤던 것이다.
디아스의 관료와 군대를 인정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순점은 혁명 정부 내에서 마데로의 입지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다. 혁명 진영 내부에서 구 체제 인사들을 우대하고 혁명군을 소외시키는 마데로의 처사에 대해 각 곳에서 불만이 분출되었고 마데로가 추진한 결속력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비록 디아스는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지배 연합은 여전히 정계, 관료,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카우디요(Caudillo), 대농장주, 관료, 군부, 교회 등 수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준 마데로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마두로를 비판하면서 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데로는 혁명 당시, 농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본질적으로는 대지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멕시코에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 국가의 외형을 만드는 것에만 열심이었다. 그러나 내형적인 차원에서 빈부격차의 해소와 토지개혁 등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 개선에는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만한 개혁을 하려면 마데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하는데 그는 기득권을 내려 놓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했다.
그러나 당시 혁명에 참가한 농민들은 식량과 자신들에게 보장될 농지를 위해 싸운 것이었다. 그리고 마데로는 멕시코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노조 설립도 허용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망명 시절에 현지에서 직접 보고 겪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를 통해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오히려 그를 지원했던 해외 재벌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멕시코의 지방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를 비롯한 농민층들이 토지 개혁을 요구했으나 마데로는 농지 개혁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사실 마데로 및 여러 혁명 지도자들이 대지주 출신이자 대부분 디아스 정권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기득권자들이었디 때문이다. 그러자 혁명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서서히 마데로의 정책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디아스의 지지층인 보수파도 마데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정치 경력이 짧은 마데로가 노련한 디아스와 같은 정치적인 수완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최초로 마데로와 결별한 자는 모렐로스 주에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였다.
사파타는 1911년 11월 25일 '강탈당한 토지, 삼림, 수리 등의 재산은 정당한 권리를 가진 마을 및 국민들이 바로 소유해야 한다(Los bienes robados, como tierras, bosques y agua, deben ser propiedad directa de pueblos y ciudadanos con derechos legítimos)'는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을 발표하면서 마데로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사파타는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을 통해 마데로가 혁명의 적들과 야합하여 디아스 독재를 능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고 비난했다. 사실상 사파타는 마데로가 디아스와 별 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디아스 시대에 수탈된 토지를 즉각 몰수하여 촌락 공동체로 환원할 것과 혁명 반대 세력의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선언하면서 마데로에게 이같은 결정을 요구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와 보상, 자율적인 자치제, 지역적 전통에 따라 공유지 혹은 소규모 사유지를 수여하는 것과 더불어 농업 은행의 설립 등 19세기 후반부터 농민들이 요구해 온 사항들을 모두 망라하였으나 역대 타 '계획'들과 다르게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고 이를 앞으로의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파타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한계였다.
사파타의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이 발표되자 토지 분배 공약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여러 촌락의 지도자들이 사파타 진영에 합류하면서 1911년 말부터 모렐로스와 푸에블라의 요충지들을 통제하였고 이들은 "사파타의 농촌 개혁 운동"을 확산시켰다. 그러자 마데로 정권은 이를 정부에 반기로 규정하고 연방군을 출동시켜 무자비한 소탕 작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한편 유화책을 구사해 사파타 세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이어 터지는 호세 레예스(José Reyes), 호세 오로스코(José Orozco), 바스케스 고메스(Vázquez Gómez) 등등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사파타 운동을 진압하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어려웠고, 농민들은 마데로 정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급기야 의회에서도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마데로는 농장주들에게 자발적인 토지 분배를 호소하기에 이르렀으나 농장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데로 정부는 전체적으로 어떠한 정책이든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잃은 셈이 되었으며 이와 같은 마데로 정권의 무능에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점차 확대되었다.
멕시코 북부 지방에서는 마데로로부터 기대에 못미친 보상을 받은 호세 오로스코(José Orozco)가 마데로를 적대하기 시작했으며 1912년 4월 3일 마데로가 노동 조건 개혁에 반대하자 이를 계기로 '콜로라도스'(Colorados, 붉은 깃발군)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마데로는 독재자 디아스의 휘하에 있었던 군대인 연방군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 장군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 1850~1916)를 보냈고 판초 비야도 여기에 종군했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우에르타는 비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비야를 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을 선고했지만 비야는 처형 직전 겨우 미국으로 탈출했다. 게다가 디아스 휘하의 장군이었던 베르나르도 도로테오 레예스 오가손(Bernardo Doroteo Reyes Ogazón)과 디아스의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 프리에토(Félix Díaz Prieto)가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레예스와 디아스는 군부의 명예가 마데로에 의해 실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군부와 구 체제 세력들에게 궐기에 동참할 것을 선동하였지만 그들의 반란은 베라크루스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초기에 마데로에 우호적이었고 멕시코 혁명을 지지하며 그에게 많은 지원을 했던 미국마저 마데로 정권의 정치, 경제적 불안정함과 치안 유지 능력 부재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멕시코 내의 자국 자본을 보호할 강력한 정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미국의 마데로에 대한 빠른 손절의 중심에는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윌슨(Henry Lane Wilson)이 있었다. 헨리 윌슨은 마데로의 정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우에르타를 비롯한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면서 마데로 정권의 전복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헨리 윌슨의 멕시코 내정에 대한 주제 넘는 개입은 멕시코 내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후일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등의 갖은 횡포를 부렸다. 더불아 마데로 정권은 반란 진압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방대한 규모의 국채를 발행함으로 인해 정부의 재정 압박을 가중시키게 된다. 마데로 정권은 내, 외부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었지만 마데로는 여전히 낙관적인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군부를 중심으로 한 반혁명 세력은 마데로 정권을 전복시킬 음모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이미 1913년 초부터 연방군 장성들의 쿠데타 설은 아예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으며, 마데로의 측근들조차 쿠데타의 가능성을 마데로에게 경고하고 나섰지만 마데로는 쿠데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애써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13년 2월 9일 몬드라곤 소총을 개발했던 마누엘 몬드라곤(Manuel Mondragón) 장군의 주도 하에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쿠데타는 19일까지 이어졌으며 우에르타 장군은 마데로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쿠데타에 대한 진압에 나섰지만 실제로는 진압하는 척,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부대에게는 반란군을 향하여 무모한 돌격 명령을 내려 군사력을 소진시켰다. 우에르타는 당시 미국 대사관의 중개로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월 18일, 우에르타 장군은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 대통령과 호세 마리아 피노 수아레스(José María Pino Suárez) 부통령을 체포한 후 투옥했고, 사형을 면하는 댓가로 대통령직을 하야를 강요했다. 마데로는 이를 수락했지만 대통령이 된 우에르타는 후일 이 약속을 어기고 2월 22일에 마데로 형제와 수아레스를 살해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멕시코 혁명 역사상 비극의 열흘(La Decena Trágica)이라 부르게 된다.
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