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를 개병대로 만들지 마라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8/16
해병을 개병으로 만들지 마라 
   
대한민국 육해공군이 그렇듯, 해병대 역시 영욕(榮辱)의 역사를 지닌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여 서울 탈환의 선봉이 된 부대였지만 그 주력은 제주도 출신들이었다. 4.3 사건 이후 ‘빨갱이 섬’의 낙인이 찍혀 버린 제주도의 청년들은 해병대에 대거 자원입대하여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또 해병대는 5.16 군사 쿠데타의 최선봉으로 한강 다리를 돌파했던 반란군의 일익이었고, 월남에 파병된 청룡부대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으나 민간인 학살의 오명을 쓰기도 했다. 이 우여곡절의 역사 가운데 기억하고 싶은 해병들의 이야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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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의 저항은 꽤 치열했다. 우리는 3일만에 서울을 내줬지만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후 서울이 수복되기까지는 2주일 가까이 걸렸다. 미군과 국군은 결사적으로 발길을 잡아채는 인민군 부대를 하나 하나 격파하며 서울 중심부로 진격해 갔다. 한국 해병대는 9월 26일 오후 인민군을 물리치고 서울 시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문제는 그 다음 진군 방향이었다. 

해병닷컴


한국 해병대는 시청을 장악한 뒤 을지로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중앙청은 미군이 접수하도록 작전 계획이 수립돼 있었다. 그러나 서울 시청을 수복한 해병대 제 2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종군기자로부터 중앙청에도 태극기를 꽂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은 이후 그의 머리 속에는 중앙청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그득했던 것이다. 그러려면 명령을 어겨야 했다. 미군들은 점령하는 건물마다 성조기를 내걸었는데 중앙청도 그럴 것이었고, 성조기보다는 태극기가 먼저여야 한다는 게 그의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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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돌한 해병 소위는 9월 26일 오후 각 분대장과 무전병들에게 엄청난(?) 명령을 내린다. “우리 목표는 중앙청이다. 소대장 외에 상부의 어떠한 호출에도 절대로 응답하지 말라.”(조선일보 1975년 6월 25일) 그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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