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예능과 파시스트의 논리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1/30
1.
TV를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역사예능프로그램을 마주쳤다. 말솜씨가 훌륭한 '전문가'가 다양한 자료화면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연예인과 이런저런 유명인으로 구성된 패널이 '아~!'하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때로는 전문가가 질문을 던지고 패널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면 '참 잘했어요'란 칭찬이 이어진다. 

그날의 주제는 '현종과 양귀비'였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갈지 너무 뻔했지만 '혹시'하는 마음에 조금 지켜봤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였다. '전문가의 가르침'은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양귀비는 어린아이 같은 피부를 유지하려고 당나귀 가죽으로 만든 아교를 복용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콜라겐을 복용한 셈이죠. 그런데 당나귀 가죽을 삶아 만든 아교는 아주 비싼 물품입니다."

"양귀비가 어떤 과일을 좋아했을까요? 맞아요 리치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리치는 남방에서 나는 과일입니다. 요즘에도 가공하지 않으면 보관이 힘든데 당나라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었죠. 그런데 양귀비가 리치를 좋아하니 현종은 싱싱한 상태의 리치를 날마다 수도로 운송시켰습니다. 당나라의 수도는 중국의 북서쪽에 있으니 리치의 생산지부터 거리가 엄청나게 멀죠. 리치가 싱싱한 상태로 그 먼 거리를 운송했으니 국가의 통치를 위해 만든 제도를 사사로운 곳에 낭비한 것이죠. 심지어 조금이라도 더 신선한 상태로 가져오려고 나무를 통채 뽑아 운송하기도 했어요."

"양귀비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아직 백 일이 지나지 않은 아이의 소변, 장미, 청주 같은 것으로 목욕했다고 합니다. 모두 구하기 힘든 재료죠."

더 이상 듣기 힘들었다. '전문가'가 앞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도 빤히 보였다. 이제는 안록산이 등장할 차례다.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제국의 자원을 낭비하는 동안, 안록산은 변방에서 힘을 키운다. 또,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는 양귀비의 환심을 사서 더욱 힘을 키운다. 현종은 양귀비에 푹 빠진 터라 양귀비가 총애하는 안록산을 조금도 ...
곽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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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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