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되지 않은 진짜 데이터는 곧 진실인가?
바야흐로 ‘팩트’의 시대다. ‘역사의 종언’으로 이념의 시대가 저문 자리에, 이성과 과학이 이념의 권위를 대체한 시대다. 서구 언론들이 1990년대에 '팩트체크'라는 새 저널리즘 형식을 발굴해내며, 냉전기 문화전쟁의 첨병에서 팩트와 진실의 가치를 좇는 매체로 거듭나는 것도, 우연찮게도 이런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있다. 국내에서 팩트체크를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JTBC가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가장 신뢰받는 언론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현상은, 팩트체크의 저널리즘적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이제 팩트체크는 정격 저널리즘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권력에 대한 언론의 견제가, 무엇보다도 정치인의 발언이 '팩트'인지 아닌지를 검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적 진리의 최종 심급은 더 이상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이념적 가치가 아니라, ‘팩트’다. 고루한 이념적 가치를 앞세우는 이상주의자들은 ‘팩폭(팩트 폭력, 팩트 폭격)’ 앞에 무력하고, 기껏해야 냉소와 비웃음을 마주할 뿐이다.
최근 세계적 '석학'들의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화제를 모은 EBS의 <위대한 수업>에,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바로 이 '팩트 폭격'이라는 이름의 강의로 출연했다(1편, 2편, 3편). 강연의 주요 내용은 대략 최근 번역 출판된 그의 전작 «지금 다시 계몽»의 내용과 큰 맥을 같이 한다. 대략 이렇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데이터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데이터가 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거부감을 보이는데, 이는 사람들의 인지 체계에 뿌리박은 심리적 편향과, 부정적인 사건만 보도하는 언론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데이터와 수치, 사실에 근거해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출판계의 동향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