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약사에게 에어컨은 기사에게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4/06/19


호사스럽게도 방에 오로지 나만을 위한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차에 혼자 전용 냉방 기기를 갖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떳떳하지 않은 일 같은데, 집의 구조상 정상참작의 여지도 있긴 하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타워식 아파트에서 우리집은 좁아지는 구간 바로 밑이라 태양광을 그대로 받아 유달리 덥고, 그중에서도내 방은 확장 공사를 해서 단열이 시원치 않은 데다 바람도 잘 들지 않는 위치라 특히 더 덥기 때문이다. 거실보다 심하면 5도는 더 더운 내 방을 인간 거주에 적합하게 관리하려면 에어컨을 쓰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일 수밖에 없다.

에어컨을 들이기 전에는 다른 방법도 여럿 시험해봤다. 아이스팩을 몸 여기저기 대보기도 하고 찬물을 떠다 발을 담그기도 했으며, 창가에 선풍기를 하나 더 놓아서 바람을 강제로 순환시키기도 했다. 이중에서 가장 시원했던 것은 찬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었다. 온몸이 상쾌함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히 물이 미지근해지면 효과가 떨어졌고, 발을 넣고 빼는 과정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주변이 젖어드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아이스팩은 수건에 싸서 겨드랑이 밑에 끼우는 게 썩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금방 식어서 갈아끼우는 게 보통 노동이 아니었고, 응결된 물방울도 골칫거리였다. 창가에 선풍기를 올려놓는 건 그나마 손이 덜 가고 지속적인 효과가 있었다. 덜 뜨거운 바깥 공기를 계속 공급하는 셈이니까. 그러나 바람을 직접 쐬지 않으면 실감이 별로 나지 않으니 이 역시 창가의 모습을 엉망으로 만들며 추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에어컨을 능가할 냉방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내 방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대로 에어컨을 가동하면 평생 갚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빚을 지는 것처럼 이것을 아끼고 아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만 틀다가, 전력량 측정계로 실제 비용을 계산해본 다음에야 그 뿌리깊은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에어컨을 좀 편하게 틀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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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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