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정치, 깨끗한 세상이라는 유토피아

최재영
최재영 · 정치의 한복판에서 철학하기
2022/12/26
여러 사람의 말싸움으로 정치적 사실은 지리멸렬한 누더기가 되기도 합니다. 새벽 두 시 넘어서도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칼퇴근을 했겠죠.

사슴이 말이 되는 기적

세월호가 침몰하던 2014년, 교수신문 연말호에서는 그 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꼽혔습니다. 지록위마는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말인데, 사슴을 말이라 부른다는 뜻입니다.

고대 중국 진나라의 내시 조고의 이야기입니다. 조고는 위대한 폭군 진시황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비선실세의 원조 격인 인물입니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그의 유서를 조작해 장남이 아닌 막내 아들 호해를 황제로 세웁니다. 황제의 적통이던 장남은 바른 말을 해서 미움을 샀거든요. 호해는 어린 시절부터 조고에게 가르침을 받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진시황을 모시던 신하들은 의문스러운 황제 호해의 말을 안 들을 게 뻔했습니다.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합니다. 황제 앞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한 겁니다. 황제는 조고에게 실수로 사슴을 말이라 부른 것이냐며 웃었습니다. 조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재차 물었습니다. 말 아니냐? 줄 잘 서라는 뜻이겠죠. 신하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침묵했지만 몇몇 신하들은 사슴을 말이라 부르면서 조고에게 아부했습니다. 바지 사장보다 실세 임원 밑으로 가겠다는 거죠. 물론 그렇지 않은 신하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슴을 사슴이라 부르며 소신껏 말했겠지요. 조고는 이들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법을 빌려 모조리 죽입니다. 조고가 휘두르고 황제가 묵인한 사법살인이지요. 정치적으로는 의도가 뻔히 보이나,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그런 죽음.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무거운 압력. 침묵하거나 아부해 살아남은 신하들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왕보다 더 왕 같은 실세가, 그것도 아주 두려운 실세가 탄생한 겁니다.


믿음이 사실에 앞선다

조고의 사슴은 사슴일까요, 말일까요? 당연히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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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의회에서 밥벌이하며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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