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시집

아듀 레비나스
아듀 레비나스 · 글쓰기 좋아하는 의사
2023/02/04
노인은 많이 수척해 보였다. 이제 세월을 못 이기는 나이. 바짝 마른 몸에 걸쳐 입은 양복은  엉거주춤 모양으로 이곳저곳이 흘러내려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노인은 진료를 받은 후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늦가을에 핀 장미’, 000 시집.
     
‘시집을 한 권 냈습니다. 시간 되시면 천천히 읽어봐 주십시오.’
     
간혹 책을 선물하는 환자들이 있다. 자신이 낸 책이라며 수필집, 시집, 때론 전문 서적에 논문집까지 주고 가시는 분들이 있다. 언제 이런 글들을 쓰셨냐고 대단하다며 책을 받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팔순을 넘긴 노인의 시집은 대단함을 넘어 인생의 무게가 주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렇기에 노인의 시집은 진료실 책상에 며칠을 그대로 있었고, 틈이 날 때마다 나는 시집을 펼쳐 들었다. 노인의 시는 그가 살아 온 인생이었다. 내가 몰랐던 그의 감정이었고, 사건이었고, 역사였다. 조그마한 진료실에서 그와 만난 시간이 어언 15년이 되는지라 어떤 시는 내게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지난 시절 그를 만나며 병마로, 가정사로 그가 겪었던 인생의 절망, 슬픔을 지켜봤던 터라 시어들은 막연하지 않게 내 가슴 속 기억을 하나둘 들춰보게 하였다.
  
노인은 심장이 좋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긴박했던 10여 년 전 일이 선명하다. 숨이 좀 차다며 진료실로 들어온 노인의 모습은 병색이 짙었다. 거칠고 짧은 호흡에다 다리는 부어있었고 청진하려고 가슴에 손을 대는 순간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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