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암투사-태조 ②] 이성계의 경처 강씨는 조선 창업의 동업자
[조선 왕실 암투사-태조 ②]
[조선 왕실 암투사-태조 ①]에서 소위 남자들이 권력을 잡아가는 바깥 사정을 살펴본 바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 집안의 안쪽 상황, 즉 가정에서는 어떠했을까.
[조선 왕실 암투사-태조 ①]에서 소위 남자들이 권력을 잡아가는 바깥 사정을 살펴본 바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 집안의 안쪽 상황, 즉 가정에서는 어떠했을까.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부터 살펴보자.
이성계에게는 모두 8명의 여인이 있었다. 첫 정실부인 신의왕후 한씨를 비롯하여 두 번째 정실부인 신덕왕후 강씨, 세 번째 정실부인이나 다름없던 성비 원씨, 그리고 후궁으로 찬덕 주씨, 화의옹주 김칠점선, 정경궁주 유씨, 궁인 김씨, 무협아 등. 태조는 이들 정실과 후궁 사이에서 모두 8남 5녀를 둔다.
여기서 우선 눈에 띄는 부분은 이성계의 ‘정실부인’이 둘 또는 세 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조선시대는 분명 일부일처제가 작동하는 유교의 나라였는데, 어찌하여 정실부인이 한 명이 아니란 말인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계가 어떤 시대에 살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이성계는 적지 않은 나이인 쉰여덟 살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일흔네 살에 사망한 점을 고려하면 그의 삶의 상당 부분은 ‘조선’이 아닌 ‘고려’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해서 그의 혼인 관련 문제 역시 조선이 아닌 고려의 상황을 먼저 따져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려시대의 혼인제도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이 확고하게 지켜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한 지아비가 여럿 지어미를 거느리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묵인해왔다. 물론 ‘정실’은 한 명이고 나머지는 ‘첩’이었다. 이를테면 ‘처첩제’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 같다.
고려 충렬왕 때 재상 박유(朴楡)가 ‘여몽전쟁’(1231년부터 1259년까지 9차례에 걸쳐 일어난 고려와 몽골의 전쟁)으로 인해 남자가 많이 죽음으로써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아졌고, 원래 해동(중국 동쪽, 즉 우리나라) 땅은 음기가 세다는 이유를 들어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주장했다가 여성들의 집단적인 반발에 부닥쳤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아무튼 처첩제에 관한 한 고려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그런데 우리가 이성계의 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