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운동 찬양이 혐오의 연료가 된다면

오찬호
2023/02/22
왜 운동 권유는 늘 무례한가
   
어린 시절, 달리기가 싫었다. 부모님은 새벽마다 나를 집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보냈다. 이유를 이해하기엔 난 어렸다. 달릴 때 느껴지는 쾌감을 습관으로 구축하기엔 난 어렸다. 운동선수가 장래희망도 아니었는지라 목표의식도 없었다. 철이 없어서였다. 맞다. 없을 나이였다. 
   
추운 겨울날 마지못해 집 밖으로 나와 자판기 코코아를 마시며 상가건물 1층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때우던 처량한 내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혼내니까 나와야 했고, 나온 까닭을 몰랐으니 시간을 낭비했다. 그런 나를 비하했다. 하지만 철학 하나를 몸으로 익혔다. 좋은 것인들, 좋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한때 달리기를 정말 좋아했다. 운이 좋아 집 옆에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책로가 늘 있었다. 10여 년을 새벽마다 달렸다. 상쾌했고 즐거웠다. 처음엔 1킬로미터가 버거웠는데, 몇 년이 지나니 6~7킬로도 거뜬했다. 비로소 부모 마음을 알고 통곡했을까?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달리기 예찬론을 전파하는 데 늘 신중했다. 의도가 좋은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아서다. 
   
나 혼자 뿌듯해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의 효능은 주변에 적당히 전파됐다. 내 기분을 ‘너도 느끼라고’ 재촉하려면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을 짚어야만 가능하다. 상식이지만, 유독 운동 권유만큼은 사람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예의를 건너뛸 때가 많다. 무례를 ‘운동이 주는 효능’에 덮어버리는 경우는 현대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운동 좀 해!”, 나는 평생 이 말을 타인에게 하지 않았다. 장담하는데, 저 말 하지 않고 사는 사람 별로 없다. 작가인지라 달리기를 키워드 삼아 나를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고픈 유혹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달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착실하고 성실하고 인자하다 등등, 그래서 바른 사람이고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직접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글을 쓸 수 있었지만 흥분하지 않았다.
달리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 픽사 베이
   
운동 중독 사회와 비만율 증가의 상관성
   
운동이 좋으니 강하게 권할 수 있지 않냐 하겠지만, 그게 마냥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과거에 비해 어떤 경우가 증가 혹은 감소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관련된 변수를 자유롭게 고민하는 과제를 종종 내곤 했다.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가 아닌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데 중점을 줬다. 자살률 증가를 ‘할 수 있다!’는 각오가 남발하는 사회풍토에서 찾는 식이다. 불가능은 없다는 분위기는 모든 것을 개인 책임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경향도 덩달아 키우기에 패배의 쓴맛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비만 인구 증가’를 키워드로 은폐된 사회적인 속성을 찾으라고 했다. 한 학생의 발표가 압권이었다. 마냥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몸 관리’라는 말이 지나칠 정도로 일상 속을 지배하게 될 때 오히려 운동할 의지가 사라지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주장이었다. 몸 관리를 안 해서 비만인데 무슨 소리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불쏘시개가 타자 자신을 짓누르는 공기의 진짜 정체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신체가 상품 수준을 넘어 도덕이 된 세상이다. 현대사회에서 ‘뚱뚱’은, 뚱뚱한 걸 넘어 비정상으로 간주되어 자기 관리의 실패를 증명한다. 살 빼서 인생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빈번한 만큼, 살도 못 빼면서 왜 불평불만이냐는 빈정거림도 흔해졌다. ‘살이 찌면 게을러 보여’라는 편견은 거침이 없다. 

논쟁된 들, 어떻게든 자신의 시야에 ‘걸린’ 뚱뚱한 사람의 게으른 모습을 나열하며 증거라고 우기기 바쁘다. 사람이 뚱뚱하니 ‘더 기억’되는 자신의 확증편향은 의심하진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한들 함부로 말해선 안 되지만, 안 그렇다 한들 함부로 말한다. 상처를 받은 사람 면전에서 자기 업보일 뿐이라면서 혐오의 수위를 조절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가 다이어트를 하고, 모두가 살찐 자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살이 찐 자신부터 자학한다. 그게 도리가 되었다. 알아서 반성하니, 사회는 비만과 게으름을 거침없이 연결한다. 살을 빼자는 공익광고를 보면,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지 뚱뚱한 사람은 욕먹어도 싸다는 건지 모를 정도다. 욕먹기 싫으면 살 빼라는 경고만이 선명하다. 그러니까, 그게 '공익' 광고다. 
   
이 공기가 있기에, 다이어트에 성공한 자들은 불필요하게 상승한 자신감을 제어하지 못해 오만해진다. 이는 다이어트가 필요해 보이는 이들을 멋대로 선별해 자존감을 짓밟아버리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더 이상 비참하게 살지 않겠다고 운동하기로 결심하는 이들을 증가시키지만, 더불어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강도와 빈도도 증가시킨다. 요요현상 한 번이면 인생의 패배자로 생각하고 두 번이면 쓸모없는 존재라 여긴다. 

이 ‘스트레스의 총합’과 삶 안에 운동을 효과적으로 곁들이는 실천의 의지는 매우 밀접하게 반비례한다. 다이어트로 인생 달라진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비만율 증가 사이에는 ‘같은 원인’이 있다. 운동을 매개 삼아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현상 말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다이어트가 강박이 되면, 그 반대편을 '건강하지 않은' 이미지로 너무 쉽게 포장한다. - 픽사 베이
달리지 못하는 이유는, 있다.
   
달리지 못한 지 4년이 되었다. 무릎을 다쳤다. 슬개골이 선천적으로 두 조각이라는 걸 마흔을 넘겨서 알았다. 한번 아프면 보름은 제대로 걷지 못하는데, 이를 반복하니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무릎이 불편하면 보행이 엉성해진다. 그런데 내 발목은 부주상골증후군 때문에 자주 아프다. 이 역시 늦게 알게 되어 수술 시기를 놓쳤다. 조심하는 것만이 답인데, 무릎이 아프니 덩달아 발목도 아파진다. 

지난 몇 년 간의 내 모습이다. 수술은,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아니라면’ 하기엔 위험이 크다는 의사 말에 따라 물리치료만 받았다. 지난 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무릎과 종아리 근력운동을 해서 일상을 버티는 수준까진 회복했지만 여전히 달리지 못한다. 아프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별 거 아닌 통증에도 별 거라고 생각하고 극도로 위축된다.
   
달리지 못해서 가장 괴로운 건 나인데, ‘못 달린다는 건 핑계다’라는 식의 글을 마주하면 허탈하다. 당신이 달려야 하는 이유랍시고 전달되는 글에는 뾰족한 창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달리기 예찬론에는 전형적인 흐름이 있다. 달리기 전 자신의 삶을 최대치로 비하하고 인생의 비포/에프터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그리고 핑계되는 사람을 공중에 매달아 공개 처형 한다. 무릎은 잘 망가지지 않는다면서 화를 내고 신체를 방치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항상 이런 식이다. 운동 찬양은 늘 누구를 기어코 나태하게 만든다. 
   
운동은, 운동하는 이가 나태하지 않은 것임을 뜻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나태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운동은 그 덕택에 일상을 나태하지 않게 보낼 확률을 높일 뿐이다. 그래서 대단한 거지만, 그래서 누구를 혐오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운동예찬이 사람 사이를 무례하게 파고들면, 인간의 존엄성은 체중, 몸매 등을 기준 삼아 선별적으로 부과된다. 
   
운동효과를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 하는 이들의 들뜬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운동 때문에 정신이 맑아졌다는 간증이 운동을 안 하는 이들은 정신이 맑지 않다는 ‘맑지 않은’ 논리로 이어져서야 되겠는가. 운동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막무가내 논리만이 부유하면 아픈 사람은 늘 자기 탓부터 하게 된다. 정말 병의 원인이 아닐지라도 ‘몸을 방치하다 병에 걸렸네요’, ‘빈약한 근육 때문에 몸이 아프다’ 등의 자학적 추임새를 일단 뱉어야 한다. 
   
달리는 이들이여! 그냥 달려라! 행복하면, 그걸 얼굴에만 드러내라! 딱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달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달리기를’ 희망한다. 못 달리는 건 다 핑계라는 티끌 같은 신호라도 보내지 마라. 그 덕에 운동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이유로 누구를 깔보는 사람도 늘어난다. 운동을 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차별받지 않을 자유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혐오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당신은 그 경계를 넘지 않으며, 운동 찬양을 하고 있는가?

*** 이 글은 나라경제 메거진 '차별의 씨앗들' 코너에 연재한  <‘확찐자’라는 표현은 언어유희가 아니다>와 <달리지 않으면 나태한가>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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