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41편 - 호주를 처음으로 발견한 영국 윌리엄 댐피어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4/26
댐피어는 영국의 해적, 항해사이자, 작가, 탐험가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뉴기니 섬을 탐험한 최초의 영국인이다. 세계 일주를 두 번 달성한 최초의 인물이며, 세 번째 항해도 성공했다. 댐피어는 1651년 6월 8일에 잉글랜드 서머싯 주의 이스트 코커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그는 16세에 선원이 되었고,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 종군하여, 1673년의 스쿠네벨트 해전(Battle of Schooneveld)에서 전투를 벌였다. 1674년, 자메이카에서 농장 지배인이 되었지만 곧 바다로 돌아왔다. 1679년에 댐피어는 바솔로뮤 샤프(Bartholomew Sharp)와 함께 중앙아메리카의 스패니시 메인 지역을 돌며, 버캐니어 해적의 일원으로서 캄페체 만에 두 번 방문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세계 일주가 된다. 그는 1679년에 파나마 다리엔 지협의 태평양 연안에서 스페인 선박 나포에 참가했고, 그 해적단은 카리브 해에 가기 전에 페루 부왕령에 속한 지역들을 약탈했다.
사진 :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 1651~1715), 출처 : Courtesy of the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Britannica

1683년에 있었던, 존 쿡 선장과의 만남은 댐피어의 전인미답의 업적을 만드는 경로를 결정짓게 된다. 쿡은 혼 곶을 통해 태평양으로 들어가 1년 동안 스페인령 (페루, 갈라파고스 제도, 멕시코)을 약탈했다. 이 전략은 음모로 진행되었으며 함대는 10척의 선박을 보유한 적조차 있었다. 쿡은 멕시코에서 죽고 에드워드 데이비스 선장이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었다. 댐피어는 찰스 스완(Charles Swan) 호의 선장으로 재배치되었다. 1686년 3월 31일, 그들은 태평양을 넘어 동인도(괌, 민다나오)를 습격하기로 했다. 스완 호를 떠나면서 37명의 해적들을 남기고 마닐라, 콘도르 섬, 중국, 향료 제도, 뉴 홀랜드(호주)로 항해를 했다. 1688년 초에 시그넷 호는 호주 북서부 해안 킹 사운드 근처에 상륙했다. 선박을 수리하는 동안 댐피어는 지역의 동식물을 기록했다. 그 해 그 배의 선원 두 명은 니코바르 제도에서 방치되었다. 그들은 작은 배를 만들어 수마트라의 아쉰(현 아체 주)에 도착했다. 새로운 모험 후, 1691년 댐피어는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환했다.

댐피어는 1699년~1701년 원정 기록『A Voyage to New Holland』를 저술한 후에 사략 활동으로 돌아 왔다. 1701년 발발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즈음하여 영국 사략선 선장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댐피어는 정부의 배 세인트 조지 호 (대포 26문, 승무원 120명)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캘레온 선인 싱크포츠 호(대포 16문, 선원 63명, Cinque Ports)와 협력하여 1703년 4월 30일까지 함께 행동했다. 그들은 프랑스 선박을 습격하는데 실패했지만, 스페인의 작은 배 3척과, 550톤 선박 1척을 나포했다. 이 전략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알렉산더 셀쿼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다. 싱크포츠 호의 선장 토마스 스토라도린과 그의 항해장을 맡고 있던 셀쿼크와의 사이에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1704년 10월 싱크포츠 호는 칠레 앞 바팬 페르난데스 제도의 무인도에 보급을 위해 정박했다. 셀쿼크는 싱크포츠 호의 내구성을 강하게 우려했고, 댐피어와 말다툼 후에 섬에 방치되었다. 셀쿼크는 4년 4개월 동안 섬에 방치되었으며, 그의 경험은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기반이 되었다. 

셀쿼크의 우려는 맞았다. 1개월 후 싱크포츠 호는 대다수의 선원과 함께 침몰했다. 댐피어는 1707년 영국으로 귀환하여 1709년에『A Continuation of a Voyage to New Holland』을 간행했다. 1708년에 댐피어는 사략선의 선장인 우즈 로저스의 듀크 호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이 항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709년 2월 2일에는 알렉산더 셀쿼크를 구출하고 원정에서 얻은 이익은 약 20만 파운드에 달했다. 그러나 댐피어는 자신의 몫을 받기도 전에 1715년에 런던에서 죽었다. 1788년 1월 26일 수백 명의 죄수들을 싣고 현재의 시드니 부근에 도착한 영국 해군 아더 필립(Arthur Philip) 대령이 1788년 2월 7일 뉴 사우스 웨일즈를 영국의 식민지로 공표하고 총독으로 취임하면서 호주는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영국에서 호주로 이송되었으며 이 가운데 약 25,000명은 여성들러 알려졌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1830년대부터 영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자유 정착민들(Free settlers)’이 호주로 이주해왔다. 

이후, 아더 필립이 시드니 만을 호주의 첫 번째 유배 식민지로 선택하기 최소 50,000년 전부터 원주민들은 항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1,500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해안에 살고 있었다. 초기 영국인들에게 식민지의 환경은 가혹했다. 총독이 4번 바뀌고 럼 폭동(Rum Rebellion)이라고 알려진 군사 반란 이후, 라클란 맥쿼리(Lachlan Macquarie)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질서를 회복시켰고 뉴 사우스 웨일즈를 호주 최초의 자유 지구로 만들어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다. 맥쿼리는 비전을 제시한 훌륭한 지도자였다. 강과 호수, 은행, 대학, 심지어 사전까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30년대까지, 시드니는 유럽으로 양모를 수출하는 활기찬 상업 항구였다. 영국으로부터의 죄수 유배는 1840년에 끝났다. 1850년대 황금 열풍이 호주를 강타했고 1851년 2월 컨트리 NSW 지역 배서스트 근처에서 에드워드 하몬드 하그레이브스(Edward Hammond Hargraves)가 처음으로 상업성이 있는 금광 지대를 발견했다. 1870년대까지, 호주의 인구는 3배로 증가했다.

1850년대 ‘골드러시(Gold rushes)’와 함께 금광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영국, 아일랜드, 유럽, 북미,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호주로 이주해왔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호주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1850년 40만 명 수준이던 인구가 1860년에는 115만 명으로, 그리고 1880년에는 223만 명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이처럼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독립 식민지들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과 경쟁을 배제하고 보다 원활한 경제 및 교역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식민지들이 연방을 구성하여 영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18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실례로 1889년 10월 24일 당시 뉴 사우스 웨일즈의 수상이었던 헨리 파크스(Henry Parkes) 경은 텐터필드 예술학교(Tenterfield School of Arts)에서 행한 연설에서 호주의 6개 영국 식민지들인 뉴 사우스 웨일즈, 빅토리아, 사우스 오스트랄리아, 타스마니아, 퀸즈랜드, 웨스턴 오스트랄리아가 연방을 구성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890년대를 거치며 호주 내부에서 더욱 확산되었고 결국 1899년 뉴 사우스 웨일즈를 비롯한 5개 식민지에서 호주연방 구성과 독립을 규정한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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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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