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아리> :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던 데이트 폭력의 기록

신승아
신승아 · 삐딱하고 멜랑콜리한 지구별 시민
2023/12/01

그 남자는 왜 여자친구를 죽였을까? 형사가 다그치자 남자는 짐짓 당황한 척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여자친구가 저를 무시하길래 홧김에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량을 줄이기 위한 거짓말 치고는 창의적이지 않고, 범행의 원인을 실토했다고 하기에는 비상식적이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 묻고 또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여자’친구가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것이다. 이 남자의 진술은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그 여자의 죽음은 일부 나쁜 남자가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으로 종결된다. 하지만 비슷한 죽음이 수없이 반복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열흘에 한 명 꼴로 여성이 연인(남성)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들이 지어낸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일명 ‘교제 살인’이라 불리는 죽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의 죽음에는 뚜렷한 원인이나 이유가 없다. 원한에서 기인한 복수심 때문에 범행을 계획한 것도 아니고, 채무 관계로 인해 트러블이 생긴 것도 아니다. 가해 남성이 피해 여성을 죽인 이유는 죄다 사소한 것들이다. 술을 많이 마셔서 죽이고, 말대꾸했다고 죽이고, 사치 부린다고 죽이고, 남자 지인을 칭찬했다고 죽였다. 반대로 술을 많이 마신다며 잔소리해서 죽이고, 자신의 씀씀이를 타박했다고 죽이고, 복잡한 여자관계를 따져물었다고 죽였다. 하찮은 변명 거리 하나 없이, 그저 기분 나빠서 죽인 경우도 있다.

이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억울한 원혼들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공정한 법의 심판이 이뤄져야 한다. 한데 가해 남성들은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하고, 죽은 피해자가 아닌 판사에게 사죄하고, 피해 유가족에게 합의금을 지급하여 형량을 낮춘다. 같은 시각, 자애로운 사법부는 가해 남성의 창창한 앞날이 걱정되어 솜방망이 처벌을 선고하며 사건을 일단락시킨다. 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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