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암투사-세종] 세종은 왕위를 물려받았을까, 꿰찼을까
이 질문의 행간에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이 숨어 있을 듯싶다. 알다시피, 세종은 애초 ‘세자’도 아니었고, 또 세자 말고도 위에 형이 한 명 더 있었던 터여서 불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왕이 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왕이 되었다. 어떻게?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형제들과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되었다는 얘기는 앞에서 한 바 있다. 세종의 즉위 배경엔 다시는 ‘왕자의 난’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태종의 성찰적 각오가 한몫했다. 태종은 고려의 문과에 급제한 인재답게 경전에 대한 소양을 갖고 있었다. 유교적 가르침대로 하면 그 자신도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쿠데타’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능하면 유교적 질서를 지키려고 시늉했다. 자신이 곧바로 왕위에 올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둘째 형을 정종에 앉히지 않았던가.
세종에게는 위로 다섯 형이 있었는데, 위 셋이 어려서 죽어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형’의 순서를 따지는 것은 태종이 그랬듯, 유교 질서가 그랬듯 당시에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해서 태종의 다음을 이을 세자 자리는 태어난 순서로 하면 넷째이지만 실질적 장남인 양녕대군에게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물론 실제로도 양녕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아직 조선의 역사가 짧기는 하더라도 맏아들 승계 원칙에 따라 책봉된 최초의 세자였다. 정통성 면에서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럼에도 왕은 동생 그것도 바로 아래도 아니고 그 아래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이 차지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불가측적 요소들이 작동했다.
사실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위로 형 셋이 요절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