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4
좋은 문제 제기네요. 저는 비건을 지향한지 이제 2년 반 정도가 되어갑니다. 지금은 동물권과 환경, 건강 문제를 이유로 채식을 하고 있어요. 제가 대표는 아니지만 '모르는개산책' 님께서 '동물권을 이유로 채식을 지향하는 분들'에게 질문을 주셔서, 답변 남겨봅니다.
1) '두더지, 고라니, 멧돼지, 참새'의 권리와 '소, 돼지, 닭, 개'의 권리는 다르다?
우선 제게 '두더지, 고라니, 멧돼지, 참새'의 권리와 '소, 돼지, 닭, 개, 고양이'의 권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종차별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동물이 인간의 폭력과 착취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물권 운동을 전개하시는 분들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전개되는 동물권 운동은, '피터 싱어'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피터 싱어는 종차별주의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비판한 사람입니다. 종차별주의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종이 다른 종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싱어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착안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 동물뿐만 아니라 비인간 동물의 행복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싱어가 던졌던 질문을 하나 읽고 넘어가겠습니다.
1) '두더지, 고라니, 멧돼지, 참새'의 권리와 '소, 돼지, 닭, 개'의 권리는 다르다?
우선 제게 '두더지, 고라니, 멧돼지, 참새'의 권리와 '소, 돼지, 닭, 개, 고양이'의 권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종차별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동물이 인간의 폭력과 착취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물권 운동을 전개하시는 분들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전개되는 동물권 운동은, '피터 싱어'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피터 싱어는 종차별주의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비판한 사람입니다. 종차별주의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종이 다른 종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싱어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착안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 동물뿐만 아니라 비인간 동물의 행복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싱어가 던졌던 질문을 하나 읽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돌멩이를 차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양이를 차는 사람은 비난한다. 왜 그럴까?"
싱어는 그 이유를 '쾌고감수성'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쾌고감수성이란 쾌락과 고통을 인지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싱어는 이러한 능력이 인간 동물뿐만 아니라 비인간 동물에게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싱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돌멩이와 고양이로 다시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돌멩이를 찼을 때 돌멩이에게는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없기에 '공공의 이익'에는 영향이 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쾌고감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
긴 글 감사합니다~! 생각해볼 부분이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이 농사짓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봐 온 입장에서 이 문제가 항상 머릿속에 고민거리로 남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생명체에게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모르는개산책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도 알 법 합니다. (사실 어려운말이 많아 조금 헷갈리기는 합니다만..)
이 문제를 '동물권의 정당화 논리' 문제로 끌고 가게될 경우에 언급하신 '권리라는 지극히 윤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려면 결국 동물권을 위한 채식은 '정당하다' 라거나 동물권을 위한 채식은 '정당하지 않다' 둘중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은 마치 밸런스 게임을 하듯이 농장동물의 권리를 선택하느냐 야생동물의 권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현재 지구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농작물들이 결국 고기가 될 농장동물들의 사료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미 농작물의 재배가 그 자체로 채식을 위한 과정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농장돼지에게 먹이기 위한 콩을 키우기 위해 야생 멧돼지를 사살하는' 상황이라고 해야할까요? 물론 온전히 인간이 식용할 목적으로만 작물을 재배하는 상황을 상정한다고 했을 때에도 야생동물들은 피해를 입겠지만, 지금 야생동물들의 터전을 가장 많이 빼앗아가고 있는 것은 '축산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다시 논리적으로 '채식을 하는 것도 동물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 말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채식으로 권리가 침해당하는 동물의 개체수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2021년 7월에만 1억 마리의 닭이 한국에서 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닭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있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하루 빨리 피해 받는 존재들을 위해 움직여야할 필요성도 있다고 봅니다.
모든 동물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이러한 동물권에 차등을 두지 않지만(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생동물보다는 가축과 애완동물을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이유는 최대다수 최대행복 최소침해의 원리와(2)) 완전비건이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3))이라고 설명하신 점 잘 알겠습니다. 더하여 사료용 곡물 농경의 축소가 동물권 침해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4)) 또한 이해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저는 사료용 곡물이 아니라 인간이 식용할 목적으로 작물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무시되는 유해조수의 동물권에 대해 질문드렸으므로 1)의 합의는 더 논의할 바가 아니고 4)의 주장 또한 논의의 실익이 없습니다.
다만 2)와 3)에서 동물권의 선택적 무시가 정당하다는 주장과 제시하신 근거들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을 가집니다.
완전한 비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피해를 추구한다는 주장은 1)에서 동물권이 보편적, 천부적 권리라고 말씀하신 내용과도 상충될 뿐더러, 역시나 인간이 무슨 자격과 기준으로 침해받을 동물을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될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야생동물의 수가 가축과 애완동물에 비해 적기 때문이라는 이유 또한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최대다수 최대행복 최소침해"는 모두 파레토 기준과 칼도힉스 기준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이들 기준은 비용보다 편익의 합이 더 클 때 그것을 개선이라고 평가하는 비용편익 분석 도구이고, 사업 시행의 결과를 계량화하여 평가할 수 있을 때나 적용 가능합니다. 이는 능률성의 영역이고 효과성의 영역에서 다뤄질 개념이 아닙니다. 연키님은 어쩔 수 없이 동물권의 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므로 소수인 야생동물이 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야생동물의 1 유틸과 가축의 1 유틸이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권리가 더 소중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권리라는 지극히 윤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논의하면서 능률성을 따지시고, 수와 효과성을 연결지으시는 주장에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고기 대용식을 사서 몇달만에 냉동실에 얼린 걸 먹었지요. 맛이없어서. 그냥 안먹으려구요. 그리 많은 고기를 먹지않는 토끼과라...차라리 한 점을 먹더라도 그냥 고기를 먹자. 으. 딜레마...주로 채식하는 1인의 입장. 채식하는 분도 육식하는 분도 모두 이해합니다.
긴 글 감사합니다~! 생각해볼 부분이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이 농사짓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봐 온 입장에서 이 문제가 항상 머릿속에 고민거리로 남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생명체에게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모르는개산책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도 알 법 합니다. (사실 어려운말이 많아 조금 헷갈리기는 합니다만..)
이 문제를 '동물권의 정당화 논리' 문제로 끌고 가게될 경우에 언급하신 '권리라는 지극히 윤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려면 결국 동물권을 위한 채식은 '정당하다' 라거나 동물권을 위한 채식은 '정당하지 않다' 둘중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은 마치 밸런스 게임을 하듯이 농장동물의 권리를 선택하느냐 야생동물의 권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현재 지구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농작물들이 결국 고기가 될 농장동물들의 사료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미 농작물의 재배가 그 자체로 채식을 위한 과정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농장돼지에게 먹이기 위한 콩을 키우기 위해 야생 멧돼지를 사살하는' 상황이라고 해야할까요? 물론 온전히 인간이 식용할 목적으로만 작물을 재배하는 상황을 상정한다고 했을 때에도 야생동물들은 피해를 입겠지만, 지금 야생동물들의 터전을 가장 많이 빼앗아가고 있는 것은 '축산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다시 논리적으로 '채식을 하는 것도 동물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 말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채식으로 권리가 침해당하는 동물의 개체수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2021년 7월에만 1억 마리의 닭이 한국에서 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닭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있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하루 빨리 피해 받는 존재들을 위해 움직여야할 필요성도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