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18편 - 카잔의 타타르인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유산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01
볼가 강과 우랄 산맥은 유라시아를 동서로 나누는 천연 경계이다. 이 자연의 가로막을 넘어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이들이 몽골인이고, 그 길을 따라 동쪽으로 팽창해간 이들이 러시아인이다. 볼가가 러시아의 '어머니의 강'이 된 것도, 우랄이 '러시아의 척추'가 된 것도 몽골의 유산인 셈이다. 서쪽에 뿌리를 내린 몽골계 타타르는 남쪽에서 전도된 이슬람을 수용했다. 타타르는 곧 투르크인, 북방 초원을 가로지르던 몽골의 혼혈 종족이다. 이들이 서쪽으로는 터키부터 동쪽으로는 신장 위구르까지 널리 포진했다. 이들 영토 사이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르기지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자리한다. 대부분이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캐밥과 샤슬릭을 먹으며 이슬람을 믿고 살아간다.
사진 : 러시아 타타르스탄의 영웅,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 사진출처 : muslim.ru https://muslim.ru/articles/272/32784/

그 투르크-유라시아 세계의 한복판에 자리한 도시가 바로 카잔이다. 유럽과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한다. 카잔은 일찍이 볼가 강을 통한 중계 무역이 발달했다. 카잔은 북방의 러시아 상인과 남방의 아랍 상인들이 교류하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이스탄불과 모스크바를 매개했던 모피 무역이 이 지역에 유명했다. 카잔은 경제적 번영은 문화적 활기로 이어진다. 이곳은 러시아에서 이슬람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곳곳에 도서관과 마드라사가 들어서 있다. 카잔은 16세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르네상스를 이끄는 거점 도시였다. 이곳에서부터 이슬람이 유라시아 초원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간 것이다. 알타이와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까지 이슬람 교인과 무슬림 상인이 퍼져나갔다. 

투르크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아랍의 지역 문명에서 세계 문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카잔은 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투르크화를 선도하는 전위 도시였다. 러시아는 카잔을 복속시킴으로써 세계 제국으로 굴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다문명 세계를 조화롭게 경영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타타르족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19세기 후반 무슬림을 관리하는 기구를 바쉬코르스탄 우파에 세운다. 그리고 정교로 개종할 것인가, 토지를 헌납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요구하며 탄압했으며 징역과 과세 또한 과도했다. 무슬림들은 차르를 원망했으며 이들우 오히려 오스만투르크의 칼리프에 의지했다. 마침 오스만투르크 또한 크림 반도와 발칸반 도의 영향력 상실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통하여 만회하려 했다. 

우즈베크 부하라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칼리프의 가계에서 군주를 영입했다. 칭기스탄 혈통의 군주만 인정하던 전통적 왕권 관념을 떨쳐내고 이슬람 권위에 기초한 통치 이념으로 바뀐 것이다. 몽골의 혈연적 정통성에서 이슬람의 문명적 정통성으로의 이행이야말로 중앙아시아의 '근대화'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이웃하고 있던 동투르키스탄에도 변혁이 일어난다. 청 제국의 카슈가르에도 무슬림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에서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받은 야쿱 벡은 금요 예배마다 이스탄불에 존재하는 오스만 칼리프의 이름을 외웠다. 서워ㆍ을 짓고 한족식 교육을 강제하는 '청 제국의 근대화'와 성당을 세우고 정교도 개종을 강요하는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에 맞서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근대화'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만큼 청 제국의  천자와 러시아 차르보다 칼리프가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스탄불로 순례를 가는 행렬이 늘어난다. 1908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카슈가르와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초원에서 메카로 순례를 가는 철도를 개통시켰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번영하던 오스만투르크의 군함들이 벵골 만까지 진출한 것도 20세기 초이다.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해양 무슬림들에게도 칼리프의 위용을 과시한 것이다. 이는 19세기를 서세 동점으로만 파악하는 것 또한 일면적이고 일방적이다. 오스만투르크도 서구열강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서부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칼리프의 영향력을 동부 유라시아의 초원길과 바닷길로 확산시키고자 분투한 시기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남부 러시아와 북부 오스만투르크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차르와 칼리프 사이 선택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신민으로서 오스만투르크의 병사들과 전투를 벌인 무슬림이 적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었고, 혈통적으로는 투르크계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지하드로 선전하면서 전 세계 움마 공동체들의 지원을 호소했다. 당시 술탄의 호소에 힘입어 무려 100만의 무슬림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이주민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파란이 그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그 공산주의와 세속주의 혁명의 파장 속에 오스만투르크는 패망 하게 되면서 칼리프는 폐지되었다. 

신(新) 오스만주의도 범이슬람주의도 폐기처분된 상태에서 세속주의 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 무슬림들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상황을 해쳐 나가려는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크림 반도 출신의 타타르 귀족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파리에서 유학한 이슬람 사상가이자 혁명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강역과 중앙아시아까지 두루 견문한 여행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 고전을 깊이 공부한데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도 밝은 인물이기도 했다. 1881년 러시아어로 출간한 <러시아의 이슬람(Ислам в россии)>은 가스프린스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러시아 내 무슬림의 공통어인 투르크어를 보통교육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스프린스키는 1883년 신문 <번역자(Переводчик)>를 창간한다. 일상적인 투르크어에 기초한 새로운 문체를 선보여, 오늘날 타타르인이 사용하는 투르크식 타타르어의 근간이 되었다. 가스프린스키는 1884년에는 <신방식 학교>를 창설하여 초등교육 개혁에 매진했다. 그는 매체와 학당을 겸장하여 이슬람 문명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이러한 타타르인 이슬람 개혁가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카잔이다. 그는 세속의 중심에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영혼의 중심 메카를 잇는 성/속의 가교로서 카잔을 자리매김했다. 그는 카잔이야말로 현대 문명과 고전 문명, 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혼합되는 이슬람 계몽주의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꾸란>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러시아어 학습도 강조했다. 러시아어를 통한 과학적 수용이 이슬람 문명과 별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쿠와 카잔과 타슈켄트를 순회하며 무슬림 대회를 개최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슬람 세계를 동시에 조망하는 독특한 관점으로 투르크-무슬림 공론장을 창출해 낸 것이다. <안녕의 나라의 무슬림>이라는 소설도 발표한다. 그의 소설은 1906년에 발간되었으니, 러일전쟁 패배 직후에 출간된 셈이다. 더불어  1907년에는 이집트 카이로까지 방문하여 아랍 지식인들과도 접촉한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세계 무슬림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창했다. <안녕의 나라의 무슬림>은 아랍의 이슬람 개혁을 이끌었던 잡지 <등대>에도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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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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