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12편 - 멕시코의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무장 단체 사파티스타
2024/04/20
최근 11월 7일에 멕시코의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무장 단체 사파티스타(Zapatista)가 완전히 해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사파티스타가 어떤 단체인지 알지 못했고 보도의 비중도 적었으며 조금 안다는 사람조차도 멕시코 범죄조직 갱단이 아니냐는 무식한 주장도 서슴없이 했다. 그러나 사파티스타는 단순히 그런 범죄조직이나 멕시코 현 정부에 저항하는 반군 무장단체가 아니다. 사파티스타들은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를 근거지로 하는 단체로 반자본주의적 성향에 어떤 정부에도 협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 성향의 집단이다. 사파티스타'라는 명칭은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에서 판초 비야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전투를 벌였던 아나키스트인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의 이름에서 따왔다.
사파티스타는 본명으로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Rafael Sebastián Guillén Vicente)라 불리는 부사령관 마르코스(Subcomandante Marcos)가 1983년 11월 17일에 창설했다. 마르코스는 1957년 멕시코 탐피코 출생으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멕시코 메트로폴리탄자치대학(UAM)의 소치밀코 캠퍼스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원래 사회주의자였다. 1983년에 사회학 연구를 위해 치아파스로 갔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을 근대화시키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맞게 공산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지난 500년 동안의 스페인 제국주의 세력과 크리오요들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듣고 자신이 그들 원주민들로부터 투쟁의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통과되자 라칸돈 정글에서 멕시코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투쟁에 돌입했다.
마르코스는 사파티스타의 무장투쟁을 주도하며 수장이자 원주민들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혁명군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파티스타에게는 실패라고 말하며, 무력보다는 언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사파티스타의 투쟁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물론 처음 12일 간은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정부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 이 외에는 공격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르코스는 이에 대하여 나의 말이 나의 무기라고 언급했고 사파티스타의 생각과 활동을 시나 편지, 에세이 등의 형식으로 인터넷 등에 올렸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 윤길순씨가 이를 번역하여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이름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이러한 마르코스의 글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진보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냈고, 멕시코 정부가 사파티스타를 함부로 무력 진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르코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서양 자본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다며 6개 도시를 점령하고 원주민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이 시기는 멕시코 혁명으로 발현한 20세기 중남미 민중혁명의 마지막 시대라고 볼 수 있고, 실제로 멕시코 정부도 그렇게 생각하여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해 끊임없이 진압하려 했다. 실제로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있었던 봉기 때도 몇 년을 준비했던 해방군은 멕시코 정부군의 진압에 스스로 방어했지만 주 근거지인 치아파스 주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이는 무장으로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무력으로 인한 공격보다는 평화롭게 무언가를 바꿔 나가고 싶은 측면이 강했다. 말 그대로 사파티스타의 무장 능력은 그리 출중하지 못했다. 총이 부족해서 나무를 깎아 만든 목총을 든 대원도 있었으며 무장된 것도 기껏해야 자동소총에 불과했다. 자동소총은 물론 중화기를 갖춘 갱단 카르텔들에 비해 약한편이지만 테러활동이나 민간인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마르코스는 즉각 자기들의 사상을 인터넷, 휴대폰 등에 담아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혁명법까지 개정해 지지를 받았다. 특히 Rage Against The Machine 밴드라는 팝 밴드는 사파티스타의 옹호자였고 웬만한 라이브 공연에서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기와 비슷한 깃발을 달고 사파티스타의 근황을 관객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마약 카르텔 갱단과 다른 점은 사파티스타는 무장집단이지만 폭력과 테러를 반대하며, 단순히 무장 혁명이 아닌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혁명을 행하는 소위 '미디어 반군'으로써 활동했다. 이러한 특성 덕택에 도의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으며 더군다나 반군을 내걸어 활동하는 집단답지 않게 점거한 지역의 치안과 안전을 도맡아 치아파스 주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꽤 많은 세계인들의 관심과 호의를 받았으며, 뉴욕 타임즈의 경우,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혁명이라 칭하기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2003년에는 근거지인 치아파스 주 라칸돈 정글에서 나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큰 문제 없이 멕시코시티까지 도착하여 멕시코 국회의사당에서 마르코스가 연설까지 하고 근거지인 라칸돈 정글로 얌전히 돌아갔다. 2000년 이후, 멕시코 정부 측도 단순한 감시와 치안 유지만 할 뿐 반란군에 대해 체포나 공격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했다간 세계인들의 비난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파티스타는 치아파스 주 시 외곽 원주민 공동체들 중심으로 '해방구'를 설립했지만 그 이후로는 크게 확장도 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공격하거나 반군 활동을 하는 일도 없었다. 더불어 치아파스 주 인구가 한 350만정도 되는데, 이중 100만 명 가량이 원주민어 화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100만 명 중 한 3분에 1은 스페인어도 잘 모른다. 그들은 원주민 모어만 할줄 아는 사람들이며 툭스틀라, 산 크리토발 같은 지역 중심 도시권만 벗어나면 여전히 멕시코 당국과도 심리적, 사회적인 거리가 먼 토착 원주민들이다.
이는 중남미에서 문화를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마야 원주민 농민들이 태반이다. 이러니 현지 주민들에게 있어 원주민들은 애초부터 정서적으로도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사파티스타가 운영하는 공동체에서는 멕시코에서 고질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마약과 흉악범죄 문제가 덜한 곳으로 멕시코 내에서 가장 치안이 안전한 곳이다. 멕시코 정부 입장에서는 국내 범죄 문제들이 사회 고질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데 치아파스 지역은 멕시코 전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오히려 저개발 지대라서 마약 카르텔 같은 자들이 자리 잡을 이권도 별로 없다. 그리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치아파스 같은 주를 괜히 정치 이념이 다르다고 토벌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그리고 사파티스타들도 혁명군과 같이 대놓고 사회 혼란을 유도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하는 일은 현지 자치 공동체 운영과 사이버 여론전 정도만 할 뿐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해방구를 확대시킨다던지 이런 행동도 오히려 자제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대원들, 지역 주민, 멕시코 당국 모두 이렇게 이해 관계가 잘 맞아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멕시코 정부는 사파티스타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며, 본인들은 무력 대신 여론 조성을 통해 '혁명 활동'만 하는 기묘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5월 2일에는 5년 간의 침묵을 깨고 마르코스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의 이름을 반란군 부사령관 갈레아노(Insurgent Subcomandante Galeano)로 바꾸면서 혁명활동을 했다. 마르코스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사실을 보여 주면서 '이 시대의 체 게바라,' '20세기 마지막 낭만적인 혁명가'라고 불리며 주목받았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으며 sns 팔로우도 상당한 수준에 있다. 그는 항상 원주민들을 제치고 나서지 않으며 항상 원주민들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마르코스는 사령관이 아니고 부사령관이다. 원주민들이 사령관이다."라고 말하며, '부사령관'을 자처했다.
그렇기에 2001년 멕시코 국회에서의 연설도 직접 나서지 않고, 원주민 여성 사령관인 에스테르가 연설을 했다. 마르코스는 2006년에는 '부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버리고, '0 대표(Delegado Cero)'라는 이름의 한 시민에 불과하다고 언급했다. 모든 것은 무(無, 0)에서 시작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장투쟁보다는 시민들과 연계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오토바이로 전국 투어를 벌이며 인지도도 높였다. 이러한 사파티스타는 전체 대원의 수가 약 7,000여 명에 지지자들은 수만 명이나 되고, 스키마스크를 착용한 이미지가 알려져 있으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풍부한 언변과 호소력 깊은 문장으로 사파티스타의 아이콘이 되었다. 마르코스 자체는 일체의 권력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다. 그렇기에 멕시코 대통령에게 "여러분이 정의하고 보호하는 세계에 우리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는 대통령 당신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알려진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력으로 우리 해결책을 강제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이전의 게릴라 방식의 고전적인 무장투쟁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대립이 아니라 정치이다. 우리는 전쟁을 일으켜 죽거나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듣기 위해 싸운다."
"인류 역사에서 좌파의 사유는 권력에 맞설 때는 가장 풍요로운 것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는 가장 빈곤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민중이 질서를 만들고, 정부는 이를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치아파스 주에서 사파티스타가 자치를 실시하는 5개 지역에서는 일체의 정부 지원을 거부하고 공동체 생활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치아파스 주의 공공 이익을 위해 사파티스타(Zapatista)들은 스스로 단체 해산을 천명하고 총을 내려놓았다. 이들의 이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멕시코 내에 아나키즘 단체로써 사회 안정화에 힘썼던 가장 모범적인 단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사파티스타는 본명으로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Rafael Sebastián Guillén Vicente)라 불리는 부사령관 마르코스(Subcomandante Marcos)가 1983년 11월 17일에 창설했다. 마르코스는 1957년 멕시코 탐피코 출생으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멕시코 메트로폴리탄자치대학(UAM)의 소치밀코 캠퍼스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원래 사회주의자였다. 1983년에 사회학 연구를 위해 치아파스로 갔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을 근대화시키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맞게 공산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지난 500년 동안의 스페인 제국주의 세력과 크리오요들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듣고 자신이 그들 원주민들로부터 투쟁의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통과되자 라칸돈 정글에서 멕시코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투쟁에 돌입했다.
마르코스는 사파티스타의 무장투쟁을 주도하며 수장이자 원주민들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혁명군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파티스타에게는 실패라고 말하며, 무력보다는 언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사파티스타의 투쟁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물론 처음 12일 간은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정부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 이 외에는 공격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르코스는 이에 대하여 나의 말이 나의 무기라고 언급했고 사파티스타의 생각과 활동을 시나 편지, 에세이 등의 형식으로 인터넷 등에 올렸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 윤길순씨가 이를 번역하여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이름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이러한 마르코스의 글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진보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냈고, 멕시코 정부가 사파티스타를 함부로 무력 진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르코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서양 자본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다며 6개 도시를 점령하고 원주민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이 시기는 멕시코 혁명으로 발현한 20세기 중남미 민중혁명의 마지막 시대라고 볼 수 있고, 실제로 멕시코 정부도 그렇게 생각하여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해 끊임없이 진압하려 했다. 실제로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있었던 봉기 때도 몇 년을 준비했던 해방군은 멕시코 정부군의 진압에 스스로 방어했지만 주 근거지인 치아파스 주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이는 무장으로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무력으로 인한 공격보다는 평화롭게 무언가를 바꿔 나가고 싶은 측면이 강했다. 말 그대로 사파티스타의 무장 능력은 그리 출중하지 못했다. 총이 부족해서 나무를 깎아 만든 목총을 든 대원도 있었으며 무장된 것도 기껏해야 자동소총에 불과했다. 자동소총은 물론 중화기를 갖춘 갱단 카르텔들에 비해 약한편이지만 테러활동이나 민간인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마르코스는 즉각 자기들의 사상을 인터넷, 휴대폰 등에 담아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혁명법까지 개정해 지지를 받았다. 특히 Rage Against The Machine 밴드라는 팝 밴드는 사파티스타의 옹호자였고 웬만한 라이브 공연에서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기와 비슷한 깃발을 달고 사파티스타의 근황을 관객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마약 카르텔 갱단과 다른 점은 사파티스타는 무장집단이지만 폭력과 테러를 반대하며, 단순히 무장 혁명이 아닌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혁명을 행하는 소위 '미디어 반군'으로써 활동했다. 이러한 특성 덕택에 도의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으며 더군다나 반군을 내걸어 활동하는 집단답지 않게 점거한 지역의 치안과 안전을 도맡아 치아파스 주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꽤 많은 세계인들의 관심과 호의를 받았으며, 뉴욕 타임즈의 경우,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혁명이라 칭하기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2003년에는 근거지인 치아파스 주 라칸돈 정글에서 나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큰 문제 없이 멕시코시티까지 도착하여 멕시코 국회의사당에서 마르코스가 연설까지 하고 근거지인 라칸돈 정글로 얌전히 돌아갔다. 2000년 이후, 멕시코 정부 측도 단순한 감시와 치안 유지만 할 뿐 반란군에 대해 체포나 공격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했다간 세계인들의 비난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파티스타는 치아파스 주 시 외곽 원주민 공동체들 중심으로 '해방구'를 설립했지만 그 이후로는 크게 확장도 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공격하거나 반군 활동을 하는 일도 없었다. 더불어 치아파스 주 인구가 한 350만정도 되는데, 이중 100만 명 가량이 원주민어 화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100만 명 중 한 3분에 1은 스페인어도 잘 모른다. 그들은 원주민 모어만 할줄 아는 사람들이며 툭스틀라, 산 크리토발 같은 지역 중심 도시권만 벗어나면 여전히 멕시코 당국과도 심리적, 사회적인 거리가 먼 토착 원주민들이다.
이는 중남미에서 문화를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마야 원주민 농민들이 태반이다. 이러니 현지 주민들에게 있어 원주민들은 애초부터 정서적으로도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사파티스타가 운영하는 공동체에서는 멕시코에서 고질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마약과 흉악범죄 문제가 덜한 곳으로 멕시코 내에서 가장 치안이 안전한 곳이다. 멕시코 정부 입장에서는 국내 범죄 문제들이 사회 고질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데 치아파스 지역은 멕시코 전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오히려 저개발 지대라서 마약 카르텔 같은 자들이 자리 잡을 이권도 별로 없다. 그리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치아파스 같은 주를 괜히 정치 이념이 다르다고 토벌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그리고 사파티스타들도 혁명군과 같이 대놓고 사회 혼란을 유도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하는 일은 현지 자치 공동체 운영과 사이버 여론전 정도만 할 뿐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해방구를 확대시킨다던지 이런 행동도 오히려 자제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대원들, 지역 주민, 멕시코 당국 모두 이렇게 이해 관계가 잘 맞아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멕시코 정부는 사파티스타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며, 본인들은 무력 대신 여론 조성을 통해 '혁명 활동'만 하는 기묘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5월 2일에는 5년 간의 침묵을 깨고 마르코스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의 이름을 반란군 부사령관 갈레아노(Insurgent Subcomandante Galeano)로 바꾸면서 혁명활동을 했다. 마르코스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사실을 보여 주면서 '이 시대의 체 게바라,' '20세기 마지막 낭만적인 혁명가'라고 불리며 주목받았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으며 sns 팔로우도 상당한 수준에 있다. 그는 항상 원주민들을 제치고 나서지 않으며 항상 원주민들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마르코스는 사령관이 아니고 부사령관이다. 원주민들이 사령관이다."라고 말하며, '부사령관'을 자처했다.
그렇기에 2001년 멕시코 국회에서의 연설도 직접 나서지 않고, 원주민 여성 사령관인 에스테르가 연설을 했다. 마르코스는 2006년에는 '부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버리고, '0 대표(Delegado Cero)'라는 이름의 한 시민에 불과하다고 언급했다. 모든 것은 무(無, 0)에서 시작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장투쟁보다는 시민들과 연계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오토바이로 전국 투어를 벌이며 인지도도 높였다. 이러한 사파티스타는 전체 대원의 수가 약 7,000여 명에 지지자들은 수만 명이나 되고, 스키마스크를 착용한 이미지가 알려져 있으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풍부한 언변과 호소력 깊은 문장으로 사파티스타의 아이콘이 되었다. 마르코스 자체는 일체의 권력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다. 그렇기에 멕시코 대통령에게 "여러분이 정의하고 보호하는 세계에 우리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는 대통령 당신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알려진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력으로 우리 해결책을 강제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이전의 게릴라 방식의 고전적인 무장투쟁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대립이 아니라 정치이다. 우리는 전쟁을 일으켜 죽거나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듣기 위해 싸운다."
"인류 역사에서 좌파의 사유는 권력에 맞설 때는 가장 풍요로운 것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는 가장 빈곤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민중이 질서를 만들고, 정부는 이를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치아파스 주에서 사파티스타가 자치를 실시하는 5개 지역에서는 일체의 정부 지원을 거부하고 공동체 생활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치아파스 주의 공공 이익을 위해 사파티스타(Zapatista)들은 스스로 단체 해산을 천명하고 총을 내려놓았다. 이들의 이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멕시코 내에 아나키즘 단체로써 사회 안정화에 힘썼던 가장 모범적인 단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