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의 수리대전쟁2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4/08/28


지난 줄거리: 프린터가 고장나서 손보다 잉크 누출로 난리가 남. 에어컨 누수를 잡음. 전동 칫솔이 부러짐.

긴 시간에 걸쳐 잉크 누출 사고를 수습했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는데, 프린터도 닦고, 바닥도 닦고, 잉크를 닦은 휴지를 담은 용기도 닦고, 작업에 쓴 장갑도 닦고, 슬리퍼도 닦고, 발도 닦고 손도 닦고, 세면대도 닦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도 프린터가 검은색이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잉크가 묻어 손을 몇 번이나 더 닦아야 했다. 게다가 프린터 받침으로 깔아놓은 스펀지도 빨아서 말려야 했고, 프린터를 올려놓은 선반과 선반 바퀴와 선반에 넣어놓은 상자들도 닦았고, 잉크를 모아둔 상자도 닦았다. 작업하는 내내 잉크도 이 모양인데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 누출은 얼마나 처리가 어려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덤으로 프린터를 새로 산다면 절대 검은색은 사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고.

그나저나 프린터 안으로 굴러간 카트리지 실리콘 마개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나는 손전등을 들고 한참동안 프린터를 들여다보다, 아무리 흔들어봐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소리도 나지 않는 터라 회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프린터 작동에 영향을 끼칠 자리에 없으니 찾지 못한다고 프린터가 더 고장나는 건 아니었다. 마개가 없으면 카트리지를 쓸 수 없게 되지만....... 그래서 다른 카트리지를 다시 살펴보다가, 쓰지 않는 카트리지에 같은 부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뽑아서 이용할 수 있었다. 나 원 참. 요컨대 처음부터 실리콘 마개를 프린터 안의 깊은 어둠속에서 찾아내려 하지 않고 대체품을 알아봤더라면 프린터를 뒤집어 흔들 이유도 없었고, 손이 닿은 모든 것을 닦아대는 헛짓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었다는 말이다. 적당한 포기가 아름다운 인생의 구성 요소라는 교훈이 프린터 수리 자체는 물론이고 부품 하나에도 서려 있었다.

새어나온 잉크를 거의 다 닦고 부품도 모아서 잉크를 주입한 프린터는 이제 정상 작동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헤드 청소나 상태 확인 페이지 인쇄를 할 때만 정상이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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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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