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빛낸 소비의 기록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4/01/04


근래에는 블로그보다는 책에 더 가까운 글을 쓰자고 결심하고 느린손을 열심히 놀려 좌충우돌하며 살았으나 어떻게 쓰든 별로 인기도 없고, 예전에 쓴 소비 어워드가 반응이 좋았으므로 올해 어워드를 다시 쓴다. 사실 무슨 물건을 고쳤다는둥 물건을 고치면서도 뭔짓인지 모르겠다는둥 늘어놓은 한탄보다는 무슨 물건을 사서 잘 쓰고 있다는 이야기나 어디 갔더니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인기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중에게 제품 정보와 구매욕이라는 확실한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별 보상이 되지 못하는 글을 너무 길게 오래 공들여 써왔다는 후회를 하며 한 해를 마치자니 영 씁쓸하다. 이런, 또 푸념을 하고 있군.

1. 헌팅캡
아름다운 가게에서 몇 천원에 구입한 헌팅캡이다. 그간 나에게 맞는 모자는 정녕 없단 말인가, 하늘은 왜 나를 낳고 맞는 모자는 낳지 않으셨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통곡하며 정처없이 떠돌고 있던 터라 예뻐보이는 모자가 보이면 일단 써보는 습관이 들었는데, 이 헌팅캡은 써보자마자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양도 무늬도 예쁘고 내 머리에 맞았다. 오히려 줄여서 써야 할 지경이었다. 이 정도로 대형 두상에 적합한 모자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반면에 모자 크기를 잘 알아보고 사야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판매자가 워낙 많아서 ‘프리 사이즈’ 같은 언어도단적 표현만 적힌 제품은 너무 많다. 다들 프리 사이즈 긴고아를 쓰거나 프리 사이즈 아이언 메이든 같은 것에 처박히는 지옥에 가길 바란다.

아무튼 성인이 된 이후로는 거의 처음으로 잘 맞고 잘 어울리는 모자를 갖게 된 것 같다. 두껍지 않은 린넨 면 혼방이라 겨울에는 추울 것 같았는데, 린넨이 열 차단을 잘해서 겨울에도 괜찮다 한다. 실제로 영하 10도에 쓰고 돌아다녔는데도 머리 꼭지가 시리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새로운 발견이다. 친구들은 딱히 모자에 대해 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어머니는 모자만 30개 이상 보유한 모자-빌 게이츠니까 모자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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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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