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91편 - 수니파와 시아파하고 결이 다른 이바드파와 오만 왕가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15
이바드파(الاباضية)는 오만과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지배적인 이슬람의 분파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알제리나 튀니지, 리비아, 동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일부나마 존재하고 있다. 수니파,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예언자인 마호메트의 사망 이후에 갈라져 나온 분파지만 본질은 하와리즈와 가까운 카지리트 파의 소속된 상류 분파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오만 왕가,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카리지트 이바드파의 최초 지도자 아브드 알라프 븐 이바드('Abd Allāh b. Ibād)의 이름에서 차용된 하와리즈 파에서도 가장 온건한 일파로 알려졌으며 그들은 하와리즈 파의 이맘인 이븐 알 즈바일(Iben Al-Zbail)의 지배를 받아 이라크 남부인 비슬라(Bhisla, 오늘날의 바스라)에 정착했으며, 692년 우마이야 왕조와 페르시아 사이의 제2차 내란이 끝난 후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를 감수해야 했다. 

또한 타키야(Takiya)라는 신체의 위해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숨기는 교리를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무슬림인 것을 감추는 자들도 많았다. 꾸란에 하드(Hardh)라고 하여 정해진 죄를 범한 자는 비록 무슬림이 아니지만, 무와히드(Muwahid)로 보아서, 동일한 이슬람교도로서의 공통성을 중시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이슬람 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죄 등 각종 사회적 문제를 재기하고, 후에 카다르(Qadar) 파가 이를 계승하게 되면서 이바드 파의 교리는 하와리즈 파와 생각은 같이 하지만 외형적으로 다른 형태를 보이기 된다. 

오만에 이바드 파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는 8세기 초 북아프리카에 전해져 이바드 파가 주축이 된 루스탐(Rustam) 왕조를 건국했다. 한편 다른 카지리트 파는 현재 거의 소멸하였지만, 이바드 파만은 리비아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 남부 알제리, 오만 및 이집트에서 17세기부터 전해지고 있고 공식적인 이바드 파의 사원에 소수의 신자들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카리지트 파가 세운 오만 이맘 왕국은 751년부터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고 시칸데르의 혈통들은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이후 시칸데르는 오만 남부에 거주하는 아즈드 족과 예멘 왕 알 자이르 간의 전쟁에서 메카 신정의 재무관(財務官) 입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원래의 메카 군 지휘관이었던 알리 카부르가 알 자이르의 용병술과 지엽적인 게릴라 전술에 대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고전하자 당시 알리 카부르의 부관이자 카지리트의 이맘인 시칸데르가 메카로 들어와 아라비아 전체의 이맘으로 선출된 후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시칸데르의 아들, 사이드 빈 키쿠트(Said Bin Qykhut)는 시칸데르 이맘의 명령에 의하여 지금의 소말리아 지방으로 건너가 그 왕인 베루아(Verua)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소말리아 구스 군을 이끌고 알 자이르의 배후 기지를 축출했다.

이렇게 키쿠트는 알 자이르를 패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키쿠트는 군사적인 재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764년에는 카말리(Qamali)에서 에티오피아의 왕 티글리드(Thiglyd)의 침략군을 격퇴하였고 이어 예멘 정복 전쟁 때는 아즈드 족 집단에게 밀리고 있던 제다 부족의 남부 전선을 이끄는 대장이 되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아즈드 족을 포위 공격했다. 그로 인하여 예멘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도중 키쿠트는 아라비아 지휘관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알 막심 빈 투르카(Al-Macsim Bin Turka)를 수여받게 된다. 

알 막심 빈 투르카(Al-Macsim Bin Turka)는 오늘 날 훈장의 개념으로 최고의 이슬람 전사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표식으로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조각된 단검을 말한다. 이를 연구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학계에서는 이 단검을 칸자르의 시초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보는 견해와 오만, 아랍에미리트의 연구자들은 시칸데르가 군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칸자르가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키쿠트는 772년에 오만의 이맘으로 선출되었고 야즈드 족의 이맘이자 예멘의 술탄인 알 자이르가 메카의 신정 통치에 반발하여 일으킨 전쟁에서 메카 지역과 전체 아라비아의 이맘으로 선출되어 아랍 연합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키쿠트가 알 자이르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압바스의 칼리프는 이러한 오만과 메카의 독자적인 이맘 직위 선출에 반발하여 이를 무효로 돌리고자 하였다. 

이는 자신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알 자이르 정벌군의 지휘권을 원한 메카의 유력 가문인 쿠라이시 무아위야 4세의 책동 때문이었다. 무아위야 4세의 사주를 받은 팔레스타인 군사령관 라이푸트(Al-Raiput)는 메카로 들어가 키쿠트를 임명한 이맘들을 카바 사원에서 추방하여 표결에 필요한 이맘 위원들 숫자가 채워지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군을 지휘하는 이맘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관례이자 권리였는데 이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로 인하여 카바 사원에서는 대대적인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결국 메카의 시내 전체가 폭동으로 시 전체 체제가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우선 키쿠트의 일부 식솔들이 메카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를 탈출하여 아프리카 동남부 잔지바르로 피신하였고 키쿠트도 잔지바르로 가서 자신과 부친인 시칸데르와 함께 전쟁을 벌였던 병사들을 모았다. 

키쿠트와 그의 병사들은 메카에서 자신의 이맘 직위 박탈을 알리려고 온 전령들을 모두 죽였고 총 6개 군단을 모은 키쿠트는 메카로 진군하였다. 무아위야 4세는 키쿠트의 기습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군사들을 모으지 못하고 에티오피아의 흑인 노예들을 모아 키쿠트의 오만 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이미 압바스 뿐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키쿠트의 정예병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아위야 4세는 키쿠트에게 완패하고 메카를 탈출하여 북아프리카로 피신하였다. 메카에서 권력을 쟁취한 키쿠트는 무아위야 4세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인 알 만수르 등을 메카와 수니파의 공적(公賊)으로 규정하고 무아위야와 압바스의 추종자들을 처형하였다. 키쿠트는 메카 이맘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여 권력 기반을 다진 후 다시 군단 병들을 이끌고 원래의 목표였던 알 자이르를 정벌하러 떠나면서 아라비아 전체의 사정은 모두 진정되었다. 

우선 키쿠트는 부친인 시칸데르와 마찬가지로 같은 무슬림인 예멘의 종족들과 군사들을 회유했다. 키쿠트는 예멘의 타무드(Thamud), 타림(Tarim), 세이윤(Seiyun), 알 카튼(Al-Qatn), 무칼라(Mukala) 등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회유에 성공한 종족들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종족들 모두 참살했다. 그리고 예멘의 해안 지역 중 활발한 무역과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는 도시들을 대부분 장악하여 막대한 양의 무역 물들을 약탈해 오만으로 이동시켰다. 

키쿠트의 오만은 고대에 이집트와 로마까지 연결된 향료의 유일한 생산지로 알려진 아덴을 공격했고 아즈드 족의 수도인 사나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그는 메카에도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아랍군의 독점권을 이용하여 아라비아 남부 지역, 특히 예멘의 각 도시들을 획득하였으나, 실제 사나와 아덴 같은 큰 도시들은 카리지트 이맘 왕국 본 군대를 이끌고 공략했다. 그리고 발달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해군을 조직해 바다에서 아덴을 공격했다. 

그리고 소말리아와 탄자니아 해안까지 이르는 아프리카 해상 정복 전쟁을 통하여 동아프리카에서 홍해 등을 거쳐 가는 물자들을 약탈하면서 원정군의 막대한 군자금을 축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인들도 대동해 중계 무역 규모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진주와 같은 보석들의 수출품들을 통해서도 상업적 이익을 취하면서 동아프리카 해안의 거점들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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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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