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현장에서 보는 능력주의란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이었을 겁니다. 국민의힘 이준석 씨가 당대표가 됐죠. 정치인으로서 이준석 씨가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노하면서 지켜 본 모습이 있었지요. 이 분이 학벌과 스펙에 의한 차별을 노력이란 포장지에 감싸서, 공정이란 이름으로 유통하더라구요. 이게 사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치권에서 내놓고 얘기해선 안 되는 금기였잖아요. 근데 이 선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했던 거죠. 

인국공, 조국 사태 이후 또 한 번 점화되었던 공정 논란은, 늘 그렇듯 학벌 스펙 노력 공정의 사분면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지지부진해졌죠. 전 이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논란의 양상은 늘 좋은 대학이나 좋은 기업에 들어갔느냐 마느냐 여부만 따질 뿐. 들어간 이후의 성과나 영향력에 대해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사람이 더 좋은 성과를 만든다.’가 능력주의의 핵심인데요. 공정론이 말하는 유능한 사람의 모델은 시험 잘 친 사람이잖아요. 근데 시험 선발 방식이 유능한 이를 가리는데 효율적임을 증명하려면, 시험 잘 쳐서 뽑힌 사람이, 시험 없이 뽑힌 사람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서, 유능함을 입증한 지표가 여럿 있어야 합니다. 그 지표가 없는 상태에서 논쟁하니 도돌이표만 찍을 수밖에 없겠지요. 

능력주의 옹호자들이 지표로 사용한 시험선발은 객관적인 효율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정과 거리가 멂을 증명한 자료는 너무나 많습니다. 실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능력주의가 공정과 거리가 멀다는 건 옹호론자들도 인정합니다. 단지 이 이상 합리적인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차악이라도 택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하죠.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시험선발에 의한 능력주의가 실제 노동과 별 관련이 없다는 점. 그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지대선점에 쓰이는 수단이란 점이 있겠네요. 전 사실 옳냐 그르냐가 아닌 차악을 말하는 시점에서 능력주의가 정당성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보는 능력주의’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능력주의라는 단어 특성상 너무 광대한 영역이 포함되는 바. 위에서 언급한 능력주의를 ‘입시와 입사의 능력주의’로 칭하겠습니다. 이는 박권일 기자님의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따왔습니다. 

또한 기술 기능에 따른 대우 차등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를 ‘현장 내부의 능력주의’로 나누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현장 내부의 능력주의’란 단어는, 소설 능력주의 5장 노동자의 지위 4편에선 숙련 노동자가 할 일은 점차 많아지는 반면. 비숙련 노동자가 할 일이 점차 사라지는 장면을 보며 떠올린 단어입니다. 

‘입시와 입사에만 작동하는 능력주의’는 사실 현장직 노동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현장 노동자는 시험으로 자신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격증 정도의 변수는 있지만, 이마저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점과, 시험이 직무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입시와 입사의 능력주의’의 무풍지대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는 형식지보단 암묵지가 더 유용한 현장 환경에 기인합니다. 이 차이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시가 있는데요. 양승훈 교수님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 해양플랜트 얘기가 나와요. 그 전까지 배 만들 때는 암묵지가 더 중요했어요. ‘하면 된다!’식으로 키워 온 현장 짬밥 말이죠. 근데 이걸 그대로 해양 플랜트에 적용했더니 망해버렸드란 거죠. 해양 플랜트는 설계, 형식지가 훨씬 중요한 역량이었거든요. 

제가 겪은 중공업 현장은 아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넘어가지 못 하고, 아직도 노동집약산업에 가까우므로 형식지보단 암묵지 역량이 훨씬 중요합니다. 현장직 노동자가 공부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 ‘입시와 입사의 능력주의’에 대한 생각의 핵심은 체념입니다. 좀 더 풀어 번역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정도겠네요.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가 탈락자에게 굴욕감을 준다고 했는데요. 제 생각에 이건 절반의 정답 같습니다. 굴욕감은 ‘입시와 입사의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인지했을 때나 들 수 있는 감정입니다. 성적만 좋을 뿐인 인간이 나보다 비교우위에 있을 때의 느끼는 짜증과 불합리함 같은 것들요. 하지만 ‘입시와 입사의 능력주의’가 이미 팽창해서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사회에선 스펙은 권력이 됩니다. 
이 권력이란, 단순히 입시, 취업시장에서의 우위뿐만 아니라, 전문성, 사회 입지, 발언 신뢰도 등의 온갖 분야에서 누리는 프리미엄을 뜻합니다. 현장 노동자들 대다수는 ‘모범생’들이 이 프리미엄을 누리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들이 과한 프리미엄을 누린다고 하여 현장 노동자가 직접 피해를 입진 않으니까요.

노동 내부의 관점으로 들어가 보자면, ‘현장 내부의 능력주의’는 노동자의 계급을 갈라버립니다. 소설 능력주의에서는 기계에 밀려난 다수의 미숙련 제조업 노동자가 일터를 바꾸며 근근이 살아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쌓인 경력과 전망은 모조리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지요. 

실제로 완벽하게 이렇게 딱 떨어지진 않습니다만. 현장엔 숙련과 미숙련 노동자의 차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로 이어집니다. 제가 이 모델을 경험한 장소는 한국 GM이었어요. 정규직에 편입되면 정규직 경력자들의 도재식 교육을 통해 고기능 고숙련 인력이 됩니다. 반면 비정규직은 단순 노동만 하다 9개월 후엔 다른 현장으로 보내버립니다. 숙련 쌓을 기회 자체를 안 줍니다.

고숙련 인력은 고용주와 협상이 가능한 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합니다. 노동조합은 줄곧 ‘울타리는 좁히고 사다리를 높이는’ 전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결과 정규직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비정규직과의 격차는 계속 커져갔습니다. 이젠 아예 비정규직으로 들어가면 절대로 정규직이 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지요. 그나마 하청 정규직 채용이 있는 회사마저 그 경쟁률이 살벌한 가운데. 하청 노동자는 그 바늘구멍을 뚫고자 잔업과 특근에 지친 몸으로 자격증 공부를 합니다. 그러다 그 하청 정규직 채용마저 세습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목도하며 좌절하기도 하죠.

저는 ‘현장 내부의 능력주의’의 부작용이, 하청 노동자의 ‘노조에 대한 적의’로 이어지는 걸 봐오고 겪어 왔습니다. 원청 노동자가 하청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걸 누리는 핵심 이유는 노동조합 때문입니다. 재벌 대기업은 효율을 이유로 계속해서 암묵지의 영역을 축소시켜 왔습니다. 주로 자동화 기술을 계속해서 도입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이 노력의 결과. 이젠 많은 현장이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차이가 크지 않은 단계까지 왔습니다. 그럼에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울타리를 좁히고 사다리만 높혀왔지요. ‘이 현장 내부의 능력주의’를 타파하려면 무엇보다 노조개혁이 필요할 듯합니다. 비정규직 제조업 노동자 입장에서 본 노조는 너무 낡고 폐쇄적입니다. 새로운 조합원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일절하지 않습니다. 의제는 늘 고용과 임금 밖에 없고 협상 방식은 데모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기조가 이어지면 정규직은 완벽하게 귀족계급화 되고, 노조는 결국 본래의 의미를 잃고 소수의 이익단체로 전락할 겁니다. 노조는 새로운 조합원을 계속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한편. 기업과 함께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를 지속적으로 좁혀나갈 협상안을 찾아나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