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인 만화 <비밀을 말할 시간> : “네 잘못이 아니야!“

신승아
신승아 · 삐딱하고 멜랑콜리한 지구별 시민
2023/09/08

2017년 9월 14일, 미국 매체 시카고트리뷴이 캔자스 대학교에서 개최된 ‘옷 전시회’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 전시회의 주제는 ‘당신은 무엇을 입고 있었습니까?(What were you wearings?)’였다. 전시장 안에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 18명이 사건 당시 입었던 겉옷과 속옷이 걸려 있었고, 바로 옆에 그들의 증언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렇다. 이 특별한 전시회의 목적은 ‘여성의 옷차림이 성범죄의 원인’이라는 다수의 몰지각한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탄처럼 쏟아지는 2차 가해 발언에 응수하듯, 피해자들의 옷차림은 각양각색이었다. 여름에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피스 차림부터 펑퍼짐한 티셔츠와 바지에 이르기까지, 소위 성범죄 가해자를 흥분시킬 만큼 ‘야한 옷차림’은 없었다.

전시된 옷들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분홍색과 빨간색이 섞인 아동용 줄무늬 원피스였다. 피해자의 증언은 더욱 충격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몇 달 후 엄마는 왜 원피스를 입지 않느냐고 물어보셨다. 난 고작 6살이었다."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성범죄자는 아동과 성인, 옷차림, 생김새, 몸매와 관계없이 범행 대상을 물색한다. 그런데 왜?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결백을 증명해야 한단 말인가. 만일 피해자에게 "네가 어떻게 처신했길래 성폭행을 당했니?"라고 묻는 대신, 가해자에게 "대체 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니?"라고 물었다면, 해당 전시회가 개최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가해자는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구정인 님의 만화 <비밀을 말할 시간>을 읽으며 자연스레 '성폭행 피해자 옷 전시회'가 떠올랐다. 주인공 은서는 일곱 살 때 동네 놀이터에서 낯선 아저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사건 당시만 해도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가해자의 행위는 또렷이 기억나지만 가해자의 신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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